여건이 나쁠 때 크게 성공할 수 있다!
백승종의 '역사칼럼'
오랫동안 균분상속제, 즉 부모의 재산을 고루 나눠가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독일 서남부 슈바벤 지방의 역사에 주목하였다. 그곳에서는 재산을 자녀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상속제도(독일어 Realteilung)를 왯동안 고집하였는데, 그러자 모두가 빈곤의 굴레에 빠졌다. 대다수 농가는 자급자족도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조선도 그러했다. 16세기부터 조선의 양반들은 집단적으로 가난해졌다.)
그러자 슈바벤 사람들은 소득을 높이기 위해 가내수공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형편이 아무리 곤란해도 도시로 이주하여, 임금노동자로 살기를 거부하였다.(영리한 조선 사람들은 상속제도 자체를 장자위주로 바꿨다.)
19세기만 하여도 독일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만 선거권 및 참정권을 주었다. 슈바벤의 영세농민들은 정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끝까지 토지를 지켰다. 한 조각의 땅이라도 가지고 살아야 시민의 권리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가난한 양반은 부유한 종가/큰집에 기대어 한 마을에 살았다.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슈바벤 주민들은 대부분 소농에 지나지 않았으나, 누구보다 근면하였고 지식과 기술의 연마에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를 비롯해 튀빙겐대학교와 프라이부르크대학교 등 독일을 대표하는 명문 대학이 슈바벤에 위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슈바벤에서는 시골사람들의 문자해독능력이 웬만한 도시를 능가했다. (가난한 조선의 양반도 학문을 닦아 대대로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고,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학자 집안의 후예라는 사회적 인정을 받았다. 지금도 우리 한국인은 '학벌'에 목을 매고 산다.)
바로 그 슈바벤에서 독일의 전형적인 기업들이 나타났다. ‘미텔슈탄트’(Mittelstand)라 불리는 중소기업이었다. 그들은 독자적인 상품을 개발해, 영국식 대기업의 틈새시장으로 파고들었다. (영국과 미국은 대량생산으로 생산단가를 낮추는데 비중을 두었다. 독일은 노동자를 훈련하여 높은 품질로 맞섰다. 한국은 지금도 고학력으로 국제적 경쟁력을 키우려한다.)
오늘날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슈바벤의 중소기업은 세계굴지의 위용을 자랑한다. 고용 면에서도 슈바벤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앞지른다. 놀랍게도 슈바벤의 중소기업 중에는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슈바벤에서 나는 10년 넘게 살았는데, 어느 마을을 가든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중소 기업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얼마나 부럽던지!)
보쉬와 메르세데스 벤츠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보쉬(Bosch)는 1886년 슈바벤의 중심지 슈투트가르트에서 직원 2명의 기계 공작소로 출발했다. 현재는 30만 명의 노동자와 함께 하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메르세데스 벤츠야 두말 할 나위도 없고, 보쉬도 전기 톱과 각종 작업도구로 세계시장을 완전히 휩쓴지 오래이다.)
요컨대, 균분제도의 약점으로 인해 슈바벤의 경제는 진즉에 파탄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도적 단점을 과감히 극복할 방법을 찾아냈다. 기술을 혁신하고, 새로운 업종을 개발함으로써 슈바벤은 활로를 찾아냈다.
※출처: 백승종, <<상속의 역사>>, 사우, 2018.
사족
궁즉통(窮即通)이라는 말이 있다. 살다가 무슨 일이 안될 때 우리는 지레 포기하는 일이 많다. 슈바벤 사람들이 억척스럽게 운명을 개척한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며, 우리의 또다른 속담을 떠올린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슈바벤에는 아직도 균분제도가 살아 있다. 재산을 골고루 나눠주는 전통이 계속되어 모두가 조금씩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서도, 차마 상속제를 바꾸지 못했다. 상속에서 배제될 자녀들의 심적, 경제적 고통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적인 몰락을 피하려고 그들은 자녀들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 교육제도를 개선하였다. 그리고 과감하게 수공업과 상업을 장려하여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였다. 슈바벤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핵심이며 그 중심지는 슈튜트가르트이다. 오늘날 독일 경제의 원동력이 바로 이 지역이다.
전망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큰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의 주희(이른바 주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혼란이 심할 때야말로 본격적으로 개혁을 시작할 수 있다." 이번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당선자는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크게 바꿀 시점이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