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44)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②

2021-12-27     조종안 기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선배들의 텃세와 질투

군산중학교 야구부 단체사진(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김성한, 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김성한은 1975년 군산상고 진학(야구부 8기) 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자상하고 따뜻했던 이준원 선생님의 인품과 ‘기량이 뛰어난 야구 선수 이전에 인간이 되라’고 권하는 최관수 감독을 통해 ‘인생의 지표’가 정해진 것. 특히 취업을 목표로 밤낮없이 공부하는 ‘은행반’ 급우들을 볼 때마다 ‘나도 야구 열심히 해서 은행에 들어가 훌륭한 지점장이 돼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3학년 선수만 열두 명, 그럼에도 1학년 때부터 중심타자로 떠오른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빨래해야지, 선배들 세숫물 떠다 바쳐야지, 합숙소 연탄불 갈아야지, 청소해야지, 타격 연습해야지··· 외출은 감히 생각도 못 한다. 어쩌다 연탄불이 꺼지면 엉덩이에 불이 났다. 고된 훈련과 매타작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선배들의 텃세와 질투. 어떤 선배는 감독 몰래 ‘볼 보이’를 시키기도 했다. 그 속에서도 새벽마다 할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러 다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6남매가 뿔뿔이 흩어져 살았어요. 저는 중학교 3학년 겨울부터 군산상고 합숙소에서 지냈죠. 세 살 아래 여동생은 해망동 산동네 단칸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결혼한 누님과 형님이 보살피긴 했지만, 고생을 많이 했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 할머니와 여동생을 보러 갔습니다. 학교 뒷산을 쭉 타고 뛰어가면 30~40분 걸렸는데요. 상수도 시설이 없는 산동네여서 수돗물을 길어드리고, 얘기 좀 하다가 돌아오면 선배들 세숫물 떠다 주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죠. 그래도 연습은 흐트러짐 없이 열심히 했습니다.”

목표가 정해지고 정신이 한곳에 집중되니 그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았다. 망령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해진 훈련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해서 저녁을 먹으면 자신의 해방구인 기숙사 뒷산에 올라 ‘이미지 스윙’으로 집중력을 길렀다. 촛불을 켜놓고 임팩트(충격) 훈련도 하는 등 그야말로 ‘전력투구’. 결과는 1976년 한해에 우승 2회(대통령배, 전국체전) 준우승 2회(청룡기, 전국 우수고교초청)로 나타났다.

제1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

제10회 대통령배 야구 결승전이 열리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1976년 5월 20일, 그날 군산 시민의 눈과 귀는 제1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 결승전 펼쳐지는 서울운동장야구장에 쏠려 있었다. 이날 경기는 군산상고 에이스 김용남과 대구상고 에이스 김시진의 팽팽한 투수전으로 7회까지 0의 행렬이 계속됐다. 9회 초, 라디오와 TV를 지켜보는 시민들은 숨을 죽였다. 그 찰라, 정적을 깨는 통쾌한 마찰음이 전파를 타고 들려온다. 2번 타자 김형종의 방망이에 맞은 천금 같은 3루타가 외야 쪽 하늘로 높이 날아갔고, 시민들의 함성은 월명산에 메아리쳤다.

다음은 3번 타자 김성한. 절호의 기회가 왔으나 승리타점은 올리지 못한다. 김시진의 악송구로 김형종이 바람 같이 뛰어들어 결승점을 뽑아냈기 때문. 9회말 결과는 1-0. 운동장은 선수들과 응원단이 뒤엉켜 눈물바다가 됐다. 지역 차별과 피해의식 속에 지내던 시민들은 최관수 감독을 헹가래 치는 선수들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아카시아향 짙은 5월의 밤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대통령배 우승기가 처음으로 전북의 품에 안긴 것을 자축했다.

군산상고 선수들 환영 카퍼레이드(중앙로 2가 개복동 교회 앞에서, 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다음날 지방 신문 지면은 군산상고 우승 소식으로 장식했다. 시청 직원들은 환영식 준비를 서두르고, 시민들은 가슴 설레며 ‘역전의 명수’들을 기다렸다. 선수들이 35사단 오픈카를 타고 전주를 출발, 익산을 거쳐 군산 시내를 한 바퀴 돌아 중앙사거리에 도착하자 시청, 우체국, 상공회의소 등 고층 건물에서는 오색 꽃가루가 뿌려졌고, 하늘에서는 경비행기가 축하퍼레이드 벌이면서 행사는 절정에 달한다. 당시 서해방송(SBC)은 사상 유례없이 전 게임을 재방송으로 내보냈다.

김성한은 “그날 이후 선수들은 전국 각지에서 보낸 팬레터를 수없이 많이 받았다”며 “군산상고 선수였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스마일피처(송상복)를 비롯해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등 쟁쟁한 선배들을 배출한 야구 명문으로, 시골 학교임에도 서울에서 캠퍼스를 구경하러 오는 학생이 많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팬레터를 보내는가 하면 종이학 5000마리를 정성스럽게 접어 보내준 여학생과 여성 하이틴스타도 있었다.

2학년(1976년) 때부터 삼루수 겸 투수로 두각을 나타내며 대구상고 이만수와 쌍벽을 이루는 장타자로 인기를 누렸던 김성한. 그는 투타에 능하고 수비가 뛰어나 ‘야구천재’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시즌에는 전국규모 대회에서 우승을 한 번도 못 한다. 최고 성적은 제58회 전국체전 3위가 고작. 그럼에도 졸업을 앞둔 선수 중 ‘군계일학’으로 대학과 실업팀들이 욕심내는 선수로 성장해있었다.

‘오리궁둥이 타법’, 배성서 감독에게 전수받아

군산상고 야구부 단체사진(가운데 줄 맨 왼쪽이 김성한, 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김성한은 1978년 군산상고 졸업생 중 ‘군계일학’이었지. 이곳저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는데, 배성서(동국대) 감독이 가장 욕심을 내더라구. 내가 ‘동기생 다섯 명도 함께 데려가라’고 했지. 그랬더니 입장이 난처하다며 총장을 만나보라는 거야. 그 해 동국대 총장이 영남대에서 옮겨온 이선근 박사였거든. 나하고 인연이 깊은 사이였지. 그래서 찾아가 ‘숨어 있는 준재들이니 동국대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요청했더니 흔쾌히 받아주더군···.”

서울상대 야구부 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온 야구인들을 찾아다니며 군산상고 선수들의 진학과 취업에 온 힘을 기울였던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 회고다. 그는 “그해부터 동국대와 군산상고 사이에 각별한 인연이 싹트게 됐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김성한 수석코치 얘기는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은행을 최종 목표로 서울의 명문대에 가려고 죽어라 고생했는데, 영남대(감독 배성서)로 가라는 거예요. 서울에서 연·고대 배지 달고 여학생들과 미팅도 하고, 연애도 해보고···. 머리를 박박 깎은 시골 촌놈이지만 왜 그런 꿈이 없었겠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가겠다고 버티면서 술 마시고 행패 부리다가 개복동 파출소에 끌려가 몽창 뚜드려 맞기도 했죠. (웃음) 그때 마침 배성서 감독이 동국대 감독으로 옮기는 바람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김성한과 함께 동국대에 진학한 군산상고 출신 선수는 송승호, 박전섭, 김형종, 최병춘, 김승래 등이다. 이들은 1학년 때부터 ‘역전의 명수’ 저력을 보여준다. 하위권을 맴돌던 동국대가 1978년 대학야구 봄철 연맹전에서 신입생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일약 6강의 결승리그에 오른 것. 그러자 배성서 감독은 1, 2학년 선수들(군산상고 출신 6명 포함)을 주전으로 기용하고,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투지의 팀워크를 구축, ‘80년대 동국대 전성기’ 기틀을 다진다.

1981년 7월. 전국으로 생중계된 제2회 한·미 대학야구선수권대회 스타는 김성한(타격상), 윤학길(다승), 박종훈(홈런상) 등. 그해 대회는 한국대학 선발팀이 역대 최고 성적(5승 2패)으로 우승, 대학 야구사에 의미가 깊다. 특히 기대를 모았던 김정수(고려대), 이만수(한양대), 김일권(한양대) 등은 부진했고, 22타수 10안타(4할 5푼)를 터뜨린 김성한은 리딩히터로 유망주에서 벗어나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다.

타격에 자신감이 붙은 김성한은 ‘오리궁둥이 타법’을 배성서 감독에게 전수받는다. 강속구에 대비, 더욱 빠르고 파괴력 넘치는 스윙이 필요했던 것.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단점을 보완하다 보니 독특한 자세가 취해졌다. 타석에 들어선 그가 타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하체를 뒤로 빼면서 배트를 뒤로 눕혀 들고, 투수를 노려보며 엉덩이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은 영락없는 오리궁둥이.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해마다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는 1980년대 중반부터 그의 아이콘이 된다. (계속)

※ 등장인물의 나이와 소속은 2013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