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복흥에서 '김종인'을 삭제한다?, '법조3성' 가인 선생 손자를 왜?
[풀뿌리 지역언론 돋보기] 열린순창
“오늘부로 김종인을 지운다.”
순창에 사는 김민성 귀농귀촌협의회장이 지역신문 ‘열린순창’에 쓴 글에서 밝힌 굳은 각오다. ‘추악한 이름, 순창 복흥에서 ‘김종인’을 삭제한다‘란 제목에서부터 비장함이 가득 묻어난다.
지난 4월 1일 신문의 ‘논단시론’에 쓴 그의 글이 최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내정자의 분주한 행보와 함께 다시 회자되며 읽히는 이유는 뭘까?
순창군민들의 명예와 긍지의 상징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글이 풀뿌리 지역신문에 소개돼 시선을 끈다.
글은 서두에서 가인 선생의 업적을 소개했다. 필자는 “순창사람들 그중에서도 필자가 살고 있는 복흥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법부의 상징과도 같은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에 대해 큰 자부심을 안고 산다”며 “그분이 나신 복흥면 하리마을 주민들은 더욱더 그러하고,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지척에 가인연수관이 있어 수많은 법조인과 가족들이 찾는다”고 썼다.
김병로 선생은 김종인 위원장의 친 조부이다. 초대 대법원장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맡아 '청렴'과 '강직'을 실천한 법조 성인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그런 가인 선생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간원 정언을 지낸 김상희의 외아들로 조선 성리학의 대가 하서 김인후 선생의 15대 손이다. 최익현의 열변에 감화되어 의병활동을 했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독립운동 관련자들에게는 무료변론을 자처했다. 한국민주당 시절에는 대다수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자는 나 홀로 토지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변호사로서 수많은 소작인의 열악한 환경을 목격한 결과였다.”
그러면서 필자는 계속 가인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이승만의 반대로 반민특위는 수포가 되었지만, 친일파를 처벌하려 했고 9년여 대법원장을 역임하며 갖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사법부 독립의 기초를 세웠다”고 치켜세웠다.
그러더니 결국엔 가인의 손자 김종인 위원장을 향해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실망이 가득 묻어 났다. 필자는 실망한 이유를 조목조목 짚었다.
“4ㆍ15 총선을 앞두고 가인 선생의 손자인 김종인이 ’이런 나라 두 번 겪으면 큰일 난다. 바꿔보자‘며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을 수락하고 전면에 나섰다. 먼저 미래통합당이 어떤 존재인가 묻고 싶다.
신한국당 새누리당의 연장선에 있는 당이다. 이명박과 박근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개과천선하고 보수를 표방했다면 얼마든지 이해하고도 남지만, 황교안 대표가 어떤 사람인가. 가인 선생은 서슬 퍼런 정권에 맞서 사법부를 지켰는데 황교안은 대표적으로 못된 공안검사 출신이다.”
글에선 실망이 끊이질 않는다. “대쪽 같은 판사 조부와 공안통 검사 황교안, 이것이 어울릴 조합인가. 노욕(老慾) 정치인 김종인은 11, 12, 14, 17, 20대 다섯 차례 국회의원을 거친 사람이다”는 글은 “모두 비례대표였다. 그 시작은 전두환 국보위와 민정당에서 두 차례 국회 비례대표였다. 노태우 정부 때는 보건사회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이어서 글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향한다.
“나는 김종인이 2004년 17대 총선 전까지 보수 행보를 이해한다. 그의 시작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새천년민주당을 뒤로하고 박근혜 캠프로 간 것도 이해한다. 더불어민주당으로 돌아와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번 총선을 앞두고 팔십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보수의 품으로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분노한다. 보수-진보-보수-진보-보수행?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필자의 일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김종인의 갈지자 행보는 가인 선생을 무척 욕되게 하는 웃음거리”라면서 “그의 발언도 더 화나게 한다”며 “'조부가 전북 분일 뿐 부친도 서울 분이고 한국전쟁 때 광주에 피난 가서 1년 반쯤 있었던 것이 전부다. 인사철마다 호남 몫이라며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좀 우습다'고 2010년 12월 한 주간지와 나눈 대담에서 밝혔다"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결국 글의 말미에서 이런 결단을 내린다.
“오늘부로 김종인을 지운다.”
그러면서 “그렇다고 조부인 가인 김병로 선생이나 하서 김인후 선생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조상의 정신과 뿌리도 모르는 사람을 연관시키고 싶지도 않고 다만 이번에 노욕의 쓴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은 간절하다“는 글 곳곳에서 실망이 가득 묻어난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이름 세자를 지운다고 할 정도다.
순창은 지난 2010년 건국 기반을 다진 초대 대법원장을 기린 ‘가인 연수관’을 개관할 정도로 가인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 2010년 7월 30일 '열린순창'의 ‘건국기반 다진 초대 대법원장 기린 가인 연수관 개관’이란 제목의 기사에서도 잘 묻어났다.
”순창군 출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을 추모해 건축된 가인 연수관이 준공식을 갖고 문을 열었다”는 기사는 “준공식에는 이용훈 대법원장과 법원관계자, 이강래ㆍ정동영ㆍ우윤근ㆍ유성엽 국회의원, 김승환 교육감, 강인형 군수, 도내 기관단체장 및 가인의 손자인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손녀 사위인 윤영철 전 헌법재판소장과 지역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가인 선생의 손자 '김종인' 이름도 거론했다.
신문은 또 당시 기사에서 “연수관은 가인 김병로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전국의 법관과 법원 공무원들의 연수 및 심신수련, 법 관련 학회 세미나 장소 등으로 활용할 예정”이라며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의 기념식사를 인용해 이렇게 전했다.
“평생 청렴하고 강직했던 가인 김병로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사치스러운 연수관을 지었다’고 꾸짖었겠지만 선생님의 공적에 비추면 때늦은 감이 있다. 가인 선생님은 헌법이라고 지칭 되셨으니 선생님의 정신을 잊지 말고 이어 나가자”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에 총 사업비 116억원이 투입돼 80,303㎡ 부지, 5,203㎡ 규모의 가인 연수원은 지난 2009년 2월 착공, 1년 5개월 만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축됐다.
특히 지하 1층에 설치된 가인 전시실은 3억원이 투입돼 초대 및 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고 후배 법조인들로부터 존경 받는 가인 선생을 기념하는 유품과 판결문, 영상물, 사법역사를 담은 각종 자료들과 흉상 등이 전시됐다.
당시 '열실순창'은 가인 선생의 손자인 김종인 위원장의 인터뷰도 실었다.
“할아버님께 순창의 생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고 자랐지만 성장하면서 실제 복흥 답동리의 생가에 자주 와 보지는 못했습니다. 순창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순창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연수관의 건립 첫 삽을 시작으로 이렇듯 준공을 하여 개관식을 갖게 되어 어느 때 보다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김 위원장은 그 당시 “가인 선생님의 성품과 많이 닮았다는 평을 듣고 계신 것 같은데 어떤가?” 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표현들이 어색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 보면 핏줄이라 그런 거 아닌가 싶다”며 웃음을 보인 내용도 담겼다.
이처럼 가인 김병로 선생은 순창지역 뿐만 아니라 전북을 넘어 화강 최대교(익산), 바오로 김홍섭(김제) 선생과 함께 ‘법조3성’으로 한국 법조계에 남긴 발자취는 실로 크다.
‘성인(聖人)’이라는 호칭이 일러주듯이 국내 법조계의 산 교과서나 다름없다. 법조계의 추앙을 받으면서 청렴과 강직을 상징하는 법조계 성인들 모두 전북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가인의 고향에서 후손의 이름이 부끄럽게 거론되며 실망과 분노로 지워져서야 말이 되겠는가? 가인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얼나나 실망이 컸을까?
풀뿌리 지역 언론의 뼈아픈 반성과 성찰을 주문하는 글에 무게가 더욱 실리는 까닭이다.
■ 가인 김병로 선생은
법조인·정치가로 본관은 울산, 호는 가인(街人)이다. 1887년 12월 15일(음력) 복흥면 하리에서 사간원 정원을 지낸 아버지 김상희와 어머니 장흥고씨 사이에서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살까지 결심했으나 용추사(현 담양 용면)에 찾아온 면암 최익현의 열변에 감동, 동지들을 규합하여 순창읍 일인 보좌청을 습격하는 등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신학문을 통한 ‘민족 자강’이 민족이 살 길이라는 신념으로 1910년부터 14년까지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과 메이지대학, 주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법조인의 기틀을 다졌다.
1919년 부산지법 판사로 취임했지만,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판을 거부하면서 그만 두고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하면서 ‘민족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변호사 시절 6ㆍ10 만세운동, 도산 안창호 등 독립투사들이 관련된 사건을 100여건을 무료변론 등 다채로운 사회 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해방 뒤 좌우합작운동을 하고 헌법기초에 참여했으며, 미 군정청과 남조선 과도정부의 사법부장을 거쳐, 1948년 초대 대법원장에 선출 되어 1953년 2대 대법원장까지 9년 3개월 동안 외부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1952년 부산정치 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 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선생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대한민국 건국과 민족정기 구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64년 1월 13일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 사회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돼있다. -'열린순창' 2010년 7월 30일 기사 중에서
/<전북의소리>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