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41)

‘원조 대도’ 김일권②

2021-12-06     조종안 기자

글러브 끼면 힘이 솟고 동작도 빨라져

1950년대 군산남초등학교 아침 조회 모습(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원조 대도’ 김일권(金一權). 그는 전북 군산시 둔율동(골목동네)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직업은 교육 행정직 공무원, 겨우 가난은 면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성격은 내성적. 수줍음도 잘 탔다. 뒷집 심술쟁이 아이가 꼬집고 때려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과 다투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턱 아래 흉자국도 그때 흔적이란다. 그럼에도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아버지 닮아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야트막한 노서산(老鼠山) 줄기 중심으로 조성된 둔율동은 조선 시대 둔전(屯田)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둔배미’, ‘군청 고개’ 등으로 불리었다. 지명에 나타나듯 1950~1960년대만 해도 ‘도시속의 산동네’로 여름이면 뒷산의 아름드리 고목들이 하늘을 가렸고, 겨울에는 천연 눈썰매장이 만들어졌다. 특히 고갯마루의 둔율동성당과 삼천리간장공장 앞마당은 아이들이 호연지기 키우는 산실 노릇을 해주었다.

“저는 1962년 군산 남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는 누가 짓궂게 굴어도 대들기는커녕 말도 못하는 순둥이였죠. 그래도 야구연습 할 때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기가 솟고 동작도 빨라졌습니다. 4학년 때 특별활동을 통해 야구를 시작해서 투수와 3루수를 겸했는데, 그때부터 영호남 대회 2연패를 하는 등 운동장을 누볐죠. 뒷산(모시산)을 몇 번씩 오르내리는 고된 훈련도 투구와 타격연습을 생각하면 힘든 줄 몰랐으니까요.”

야구를 함께 시작했던 ‘스마일피처’ 송상복 씨는 “처음에는 일권이가 투수도 했던 것으로 아는데, 야구 감각도 뛰어나고, 순발력도 좋고,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해내는 등 특출한 친구였다”며 “어려움에 부닥친 동료들을 위해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는 등 희생정신도 강했다”고 기억한다. 그는 “말은 없지만, 소신과 주관이 뚜렷한 친구여서 가끔 손해를 볼 때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남초등학교 야구부는 군산 시내 4개 초등학교 중 가장 강팀으로 성장한다. 선수들(11명) 연습을 눈여겨본 당시 이용일 전북 야구협회 회장과 김병문 군산남중·상고 교장은 그들을 모두 1968년에 창단한 군산남중에 특기생으로 입학시킨다. 그중 김일권, 송상복, 양종수, 조양연 등은 3년 후 나란히 군산상고에 입학한다.

“1971년 군산상고(야구부 4기)에 진학해서 3학년 선배들의 ‘줄빠따(매타작)’ 때문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1, 2학년생들이 중국집에 모여 짜장면 한 그릇씩 먹고 도망가자고 모의를 했겠어요. 저는 서울로 튀었다가 사흘 만에 잡혀 와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맞았죠. (웃음) 3학년 10명이 두 대씩, 스무 대 맞으니까 얼얼하더군요. 그렇게 매타작 당하면서 ‘반항심’이랄까, 상대에게 모순점이 보이면 따지기도 하는 등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연습은 죽어라 했죠.”

군산상고 3학년 때 ‘이영민 타격상’ 받아

1970년대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군산상고 선수들(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고된 연습과 선배들의 매타작을 투지와 뚝심으로 버텨낸 김일권은 2학년 때부터 1번 타자 자리를 굳힌다. 야구 전문가들도 그를 군산상고 간판타자로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 화답하듯 시합 때마다 포문을 열면서 득점과 연결되는 장단타를 터뜨렸다. 안타를 치거나 4구를 골라 1루에 나가면 천부적인 주루 감각과 빠른 발로 상대 팀 마운드를 혼란에 빠뜨렸다.

한국 고교야구 기존 판도를 뒤엎었던 1972년 황금사자기 대회 부산고와 결승전 9회 말 기적같이 일궈낸 역전 우승에도 기여하면서 고교야구 스타로 떠오른다. 그해 가을 일본 간사이(關西) 지역에서 열린 한·일고교야구대항전(11월 11일~21일)에 한국고교 선발팀 일원으로 원정, 나라(奈良)팀과의 3차전 경기에서 도루 5개를 기록하는 등 호타준족의 기량을 과시한다.

1973년 군산상고는 전국규모 대회에서 4강에 한 번도 들지 못한다. 그해 5월 대통령배 대회에서 인천고와 11회 연장 끝에 4-5로 석패한 것을 비롯해 청룡기대회는 경남고에 1-3으로, 봉황대기 대회는 전남고에 0-1로, 황금사자기 대회는 8강전에서 대전고에 4-5로 패하는 등 잇달아 고배를 마신다. 그러한 부진 속에서도 한국 고교야구 대표팀에 선발되는 등 신기에 가까운 타력을 보여준다.

1972년 황금사자기 우승 후 최관수 감독을 헹가래치는 군산상고 선수들(출처 한국야구사)

그는 1973년 12월 ‘이영민 타격상’을 받는다. 스승 최관수 감독이 동산고 시절 받았던 상이어서 의미를 더했다. 1958년 제정된 이영민 타격상은 대한야구협회가 매년 3회 이상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30타석 이상 기록한 고교선수 가운데 타율이 가장 높은 선수에게 수여하는 영예로운 상이었다. 김일권은 그해 전국대회에 4회 출전, 41타수 17안타(타율 4할 1푼 5리)를 기록했다. 그는 당시 팬레터도 많이 받았었다며 1998년에 타계한 스승을 떠올렸다.

“최관수 감독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죠. 고급 전술과 타법을 터득한 것은 물론이고요. 지리멸렬했던 팀을 국내 정상 수준으로 올려놓은 지도력,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등이 놀라웠죠. 특히 ‘한문과 주산은 꼭 배워두라!’는 당부는 잊지 못합니다. 그때 배운 실력이 지금도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거든요. 가끔 옛 모습이 떠오르면서 건강하셨으면 해태 타이거즈 초대 감독을 맡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프로야구가 없던 1973년. 그해 국내 고등학교와 대학 졸업반 야구선수는 모두 235명(고교 216명, 대학 19명)이었다. 하지만 한 해 동안 각종 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대학과 실업팀 스카우트 대상에 오른 선수는 고작 50명 안팎이었다. 따라서 170명 정도는 새로운 진로를 찾지 못하면 선수생활을 그만둬야 했다. 한편 김일권은 고려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놓고 있었다.

일본 진출 좌절 후 대학캠퍼스 더욱 그리워져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는 1971년 전국체전 우승에 이어 이듬해 2관왕을 차지, 호남에 야구 붐을 일으키며 국내 정상급 팀으로 자리매김한다. 경기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방전, 투지와 끈기로 접전을 펼치면서 팬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녔다. 1971년~1972년, 그 짧은 기간에 놀라운 저력(우승 3회, 준우승 1회)을 보여줬음에도 선수들 진로는 불확실하기만 했다.

“나는 김일권의 진로를 놓고 당시 한일은행 김응용 감독과 끈끈한 인연을 맺었다. 김응용 감독은 김일권을 원했고 나는 양기탁과 함께 입행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중략) 김응용 감독은 애써 노력했지만, 한일은행은 김일권 한 명밖에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김 감독은 며칠 뒤 ‘죄송합니다. 김일권을 포기하겠습니다’라고 정직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래서 김일권과 양기탁은 함께 상업은행으로 갔다···.”

위는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이 ‘중앙일보’에 52회(2003년 3월 31일~6월 12일)에 걸쳐 연재한 <白球와 함께 한 60년>에서 김일권 관련 회고다. 이 전 총재대행 회고대로 1973년 10월 5일 치 <경향신문>은 김일권을 한일은행 스카우트 예정자로 보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처음 스카우트 제의는 금융팀이 아닌 고려대였다”며 자신 또한 고려대를 희망하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연·고대 진학이 목표였는데, 마침 고려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아, 내년에는 연고전 뛰겠구나!’ 하고 가슴이 부풀어 있었죠. 근데 아버지가 한사코 반대하시는 겁니다. 그때 처음 아버지에게 말대꾸했고, 귀싸대기도 맞았죠. 아버지는 ‘네가 대학에 가면 용돈을 댈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대학에서 스카우트비랑 장학금 받으니까 용돈은 필요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 저보다 조금 처지는 선수를 한두 명 데리고 갈 수 있는 위치니까 학교에서 아버지를 통해 상업은행으로 유도했던 겁니다.”

국내 최고 대학스포츠 축제인 연고전(고연전) 출전이 지상 최대 목표였던 김일권은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상업은행으로 진로를 정한다.

“결국 상업은행(감독 장태영)으로 마음을 정하고, 입행 동기생 9명이 장태영 감독에게 인사를 갔죠. 근데 대뜸 집 주소와 가족 이름을 한자로 써보라고 하는 거예요. 모두 놀랐죠. 저하고 양기탁 둘만 써냈는데, 이번에는 마음에 드는 중앙 일간지 사설을 골라 노트에 옮겨 오라는 숙제를 내더군요. 그것도 매일. 연습 끝나면 숙소에서 한자투성이인 사설을 적느라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였죠. 그런데 지금은 생활의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필체 좋다는 칭찬도 듣고요. (웃음)”

상업은행 선수 시절(1975년) 태극 마크를 달고 이선희 선수와 미국행 비행기에서(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상업은행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는 1975년 추계연맹전 타격왕(타율 4할 6푼 2리)에 오르면서 상업은행을 12년 만에 우승(7승 1패)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대회가 끝나자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팀 가네다(金田正一) 감독은 언론을 통해 김일권, 장효조, 이선희 등을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밝힌다. 가네다 감독은 한국계로 제2의 장 훈, 백인천을 스카우트하겠다고 해서 관심을 끌었다.

당시 팬들은 한국 선수들의 일본 진출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체육계 역시 한국야구 사상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입단한 백인천 선수도 1962년 병역 특혜를 받아 출국한 전례가 있어 가네다 감독이 탐내는 선수들에게도 병역 특혜를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여망이었다. 그럼에도 김일권은 병역법에 묶여 꿈을 접어야 했다. 일본 진출이 좌절되자 대학 캠퍼스가 더욱 그리워졌다.

“1974년~1976년까지 상업은행 소속이었는데, 대학 진학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체육 특기자 혜택 기간이 3년이었거든요. 상의할 사람은 없고, 속만 태우다가 하루는 장태영 감독님에게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단칼에 ‘안 돼!’라고 하시더군요. 해서 ‘감독님은 옛날에도 명문인 서울대학 나오신 것으로 아는데, 왜 저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무 말씀도 없으신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당돌하고 건방졌죠. (웃음)”

김일권은 상업은행 소속 3년의 마지막 무대를 통렬한 대역전 홈런으로 장식한다. 1976년 10월 25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추계실업야구 연맹전 마지막 경기(상업은행-한일은행)에서 9회 초까지 두 점(0-2) 리드당하다 9회 말 주자 1, 3루 상황에서 한일은행 에이스 주성노의 두 번째 볼을 받아쳐 끝내기 3점 홈런을 터뜨린 것. 승리를 목전에 두고 안도의 숨을 내쉬던 김응용 한일은행 감독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그때였다. (계속)

※ 등장인물의 나이와 소속은 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