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 죽겠다?

만언각비(12)

2020-05-29     이강록

요즘 같은 웃을 일 드문 세상에 우스개 소리 하나. 습관적으로 ‘~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무슨 말이든 뒤에 ‘죽겠다’를 붙여 말하곤 했다. ‘졸려 죽겠다’ ‘화가 나 죽겠다’ ‘목말라 죽겠다’고 말했다. 급기야 ‘행복해 죽겠다’ ‘황홀해 죽겠다’고도 했다.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얘야 너는 어째 말끝마다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사느냐? 좀 고쳐라”하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했을까? “예 어머니, 노력할게요. 저도 그 못된 버릇만큼은 고치고 싶어 죽겠어요.”

요즘 너도나도 죽겠다고 야단이다. ‘경제가 어려워 죽겠다’, ‘실직을 해서 죽겠다’, ‘수입이 줄어서 죽겠다’, ‘공부가 잘 안돼 죽겠다’ 등 한결같이 죽는 소리다. 실제로 그만큼 힘들고 각박해진 세상살이를 보여주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다 코로나 19까지. 아뿔싸! 죽을 맛이기는 하다.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어서 죽겠다.

모두가 꺼리고 두려워하면서도,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너무나 쉽게 내뱉는 말이 ‘죽음’이다. 사(死)자와 음이 같다 하여 생활 속에서 숫자 4를 꺼리면서도 ‘죽겠다’는 표현이 아주 입에 붙어있다.

툭하면 창피해 죽겠고 서러워서 죽겠고 억울해서 죽겠다고 말한다. 뿐인가. 귀여워 죽겠다거나 보고 싶어 죽겠다고도 하며, 심지어 좋아서 죽겠고 즐거워 죽겠고 우스워 죽겠다고 까지 한다. 한술 더 떠 재미가 있어도 죽겠고 재미가 없어도 죽겠다고 한다.

배고파 죽겠다거나 무서워 죽겠다면 죽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렇다 치자. 하지만 졸려서 죽거나 심심해서 죽거나 게임하고 싶어서 죽지는 않는다. 하물며 바빠서 죽을 수는 없고 할 일이 없어 죽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물론 여기서 죽겠다는 뜻은 ‘견디기 힘들 정도’라는 뜻을 극도로 강조한 것임은 익히 안다. 그러나 죽겠다는 표현을 너무 자주 남발하다 보니 아예 감각이 무뎌진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도에 넘치는 표현이 동원돼야 직성이 풀리고 의사소통이 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단지 ‘미치겠다’ 쯤이나 ‘힘들다’로 바꿔서 표현해도 충분히 뜻이 전달될 수 있을 터인데 오로지 화끈하고 쌈박한 표현이 아니면 안 된다고 여겨서인가.

결사(決死))니 사수(死守)니 하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 결사이고 죽을 힘을 다해 지키는 것이 사수인데, 결사와 사수라는 말을 다반사처럼 한다. 그러니 말의 인플레가 심해져 정작 자신의 속뜻을 전하려 할 때는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렵게 된다.

어디 그뿐이랴. 서로 견해상 대립을 하게 되면, 상대방을 박살(撲殺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때려 죽이는 것)내겠다고 공언하면서 필사적(必死的)으로 달려든다. 그야말로 죽음이란 말이 난무하는 현실이다. 우리는 그처럼 격하고 험한 세상에서 악착같이 산다. 그러나 사실은 죽기 싫어서 악다구니를 쓰고 아등바등하는 것임은 정한 이치다.

우리는 다들 주변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죽겠다’는 말을 쓰는 사람들을 만나며 산다. 물론 실제로 죽을 만큼 힘들게 사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결코 힘에 부쳐 죽지는 말 일이다. 모두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들이 빚어낸 우리 삶의 한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