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은 나무 벤치 위에 앉아 있다

신정일의 '길 위에서'

2021-12-01     신정일 객원기자

2021년 11월 30일. 11월의 마지막 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이 날이 아니면 이 산의 단풍이 다 떨어져 버릴 것 같아서 찾아간 건지산. 아직도 남은 단풍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저 단풍잎들, 오늘 밤 비바람에 다 떨어져 버리고 말 테지, 하고 거닐다가 바라본 나무 벤치에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 문득 한 편의 시가 떠오른다.

광장의 벤치 위에

어떤 사람이 앉아

사람이 지나가면 부른다.

그는 외 안경에 낡은 회색 옷

엽권련을 피우며 앉아 있다.

그를 보면 안 된다.

그가 보이지도 않는 양

그가 보이지도 않는 양

그냥 지나쳐야 한다.

그가 보이거든

그의 말이 들리거든

걸음을 재촉하여 지나쳐야 한다.

혹 그가 신호라도 한다면

당신은 그의 곁에 앉을 수밖에

그러면 그는 당신을 보고 미소 짓고

당신은 참혹한 고통을 받고

그 사람은 계속 웃기만 하고

당신도 똑같이 웃게 되고

웃을수록 당신의 고통은 더욱 참혹하고

당신은 거기 벤치 위에

미소 지으며 꼼짝 못하고 앉는다.

곁에는 아이들이 놀고

행인들 조용히 지나가고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고

당신은 벤치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당신은 안다. 당신은 안다.

이제 다시는 이 아이들처럼

놀 수 없음을

이제 다시는 조용히

이 행인들처럼 지나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이 새들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자끄 프레베르의 '절망은 나무 벤치 위에 앉아 있다'의 시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그러나 어디 절망이 나무 벤치 위에만 있는 것일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새에, 내가 잠드는 따뜻한 이불 속에 아침 일찍 일어나 마시는 커피 잔 속에 우리가 의식하던 안하던 간에 담겨져 있던 절망의 무게, 세상은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흐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 마지막 악장처럼 저마다 혼자서 가야 할 우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