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호 이익을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백승종의 '역사칼럼'
조선시대에는 많은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성호 이익을 첫 손가락에 꼽습니다. 다산 정약용도 아마 그러했던 것 같아요. 왜 하필 이익이란 실학자를 최고로 치는가요. 연전에 쓴 제 책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사우, 2019; 세종 우수 교양 도서)을 읽어보신 분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그 책에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경전 해석은 이익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기설처럼 추상적이고 고원한 학문은 실생활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로서는 문헌을 통한 철저한 검증만이 학문 연구의 참된 길이었다. 또는 자연현상을 직접 관찰함으로써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호 이익은 이른바 성현의 주장이라도 비판적인 관점에서 검토했어요. 사물의 진실을 캐려고,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지에서 이치를 발견함)'의 태도를 견지한 겁니다. 그 결과는 대단한 학문적 성취로 나타났어요.
"그는 주류학자들이 철옹성처럼 쌓아올린 형이상학의 성채를 허물고 일상과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새로운 학문운동에 종사했다. 이익이 『중용』 연구를 통해 얻은 지식이 결코 한둘은 아니었다."
그것을 제가 여기서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지요. 그저 두어 가지 예만 간단히 들어볼까 합니다.
"우선 ‘민수敏樹’라는 개념에 관한 새로운 설명이다. 『중용』 제20장에는, “땅의 도는 나무에게서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地道敏樹)”라는 구절이 있다. 이익은 거기에 보이는 ‘민수’의 개념을 천착했다(이익, 『성호사설』 제6권, 「민수敏樹」 참조)."
물론 대수롭게 넘길 수도 있는 표현이었는데요. 하지만 이익은 이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정치의 효과에 관한 것이라서 그랬지요. 그는 자신이 자연현상을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이 구절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는데, 그 설명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봄비가 내리면 나무는 싹이 움터 날마다 조금씩 자란다. 만약 날이 가물면 어떨까. 말라 죽을 것이다. 잎과 가지는 왜 마르는 것일까. 뿌리에 병이 생겨서 그러하다. 가지와 잎이 마르기 전에 뿌리에 물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 만약 나무가 이미 말라버린 뒤에 보살피려면, 서강西江의 물을 다 부어도 효과가 없다."
옳은 이야기 아닙니까. 이제 이익의 시선은 백성을 향합니다.
"백성이 나라를 원망하는 것도 나뭇잎이 병드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임금이 일신의 안일만 생각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때 가서 임금이 온갖 혜택을 백성에게 준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선시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주장이지요. 부동산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져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깨닫지 못하는 정치가들, 청년 문제가 해마다 도를 더해도 실감하지 못하는 고위 관료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지요. 이익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아무리 가지와 넝쿨이 무성한 식물도 뿌리를 끊으면 얼마 안 가서 말라 죽고 만다. ‘땅은 나무를 잘 자라게 한다.’ 민수敏樹의 증거를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이익은 『중용』에서 마주친 평범한 표현 하나에서도 정치적 교훈 또는 일상생활의 심오한 이치를 발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 이익이었으므로, 『중용』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통념이 그릇된 부분도 발견하였는데요. 가령 '3대를 제사 지낸다'는 한 구절에 어떤 역사적 진실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이익이 쏟아 부은 시간과 정열이 비상했습니다(이익, 『성호사설』 제10권, 「제삼세祭三世」).
누구나 다 알다시피 조선 후기에는 4대 봉사(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제사)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익은 고전 문헌을 토대로 이런 풍습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살펴보았어요.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익의 출발점은 『중용』 제12장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습니다.
“아비는 대부이고 아들이 사士이면 장사는 대부의 예로 지내고 제사는 사의 예로 지내며, 아들은 대부이고 아비가 사이면 장사는 사의 예로 지내고 제사는 대부의 예로 지낸다.”
이 문제에 관한 문헌을 이익은 자세히 조사했고, 그 결과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첫째, 중국 고대의 대부에게는 제전(祭田)이 지급되었다. 그것은 자손의 지위가 아무리 미천하게 되어도 국가가 도로 빼앗지 않았다. 제전이 남아 있었기에 후세는 대부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나중에 자손이 귀한 벼슬을 얻으면 위로 대부의 부와 조부(祖禰)까지 모시게 되었다. 나라에서 반드시 여유 있게 땅을 추가로 지급했던 것이다. 옛날에는 녹봉 외에 별도의 땅을 주어 그 수확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던 것이다."
중국 고대에는 녹봉 외에도 고위 관리 집안이 제사비용을 조달할 수 있게 별도의 밭을 나눠주었다니, 놀라운 일이지요. 그만큼 제사가 중요했던 시절이었어요.
"둘째, 대부가 잘못을 저질러 자기 나라를 떠나더라도 3년 동안은 그의 토지와 봉록(田祿)을 회수하지 않았다. 하물며 벼슬을 잃고 떠나는 경우에는 제전을 빼앗을 리가 없었다."
퇴직금이 다로 없었던 시절인지라 자리에서 물러나도 3년간은 물질적으로 궁핍하지 않게 선처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대부 이하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사당은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신주神主가 없었다. 띠를 묶어세우고 신이 의지하게 하여 제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관직에서 물러나도 3년간은 제전이 있었기에 사당을 바로 없애지 않았다. 만약 3년 후에 사당을 허물게 되면 다시는 제사지내지 않았다."
중하위 관리도 중국 고대에는 3년간 생계 및 품위유지 비용을 국가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요. 그런데 보장된 3년이 지자 뒤에도 복직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사 지을 밭이 없으면 철철이 나오는 생산물만 올리고(천신薦新)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가령 봄에는 부추를 천신했다."
벼슬이 없으면 제사는 간소하게 바뀌었고, 윗대의 여러 조상을 모신 사당 같은 것도 없었다는 뜻이군요. 바로 여기에 실학자 이익이 조선사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단호하게 밝히기도 합니다.
"넷째, 농사짓지 않는 선비라면 제사 때 곡식(粢盛)을 제단에 올리지 않았다. 가축(六畜)을 기르지 않으면 희생(犧牲)도 바치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사 용품은 후손이 생산한 것이라야 한다는 겁니다. 농업 또는 목축업에 종사하지 않는 서생이라면 사실상 제사를 지낼 의무가 없었다는 사실, 그 점을 이익은 강조하였습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극도로 중시하던 중국 고대에도 풍습이 그와 같았다는 점, 아마도 조선의 선비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역사적 진실이었을 것입니다. 실증적 연구란 이래서 중요한 것이고요. 고대의 제사에 관한 이익의 연구는 이제 마지막 귀결점을 선포할 일만 남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다섯째, 후세에는 관직이 없는 선비들까지도 4대까지 제사를 모시고 나무를 다듬어 조상의 위패를 세웠다. 4대 봉사는 한 나라의 임금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어찌 이것을 옳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충격적인 발견이요, 또 충격적인 발언이었지요. 이익은 고전 문헌의 연구를 통해서, 4대를 제사 지내는 조선의 풍습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했습니다. 물론 조선 사회의 기득권층은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에다 이렇게 두어 마디를 보태었지요.
"세상의 비난이 예상되었으나, 이익은 실증을 토대로 한 자신의 연구결과를 서슴없이 세상에 내놓았다. 이익의 용기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17-18세기에 성호 이익이란 선비가 등장하여 조선 사회에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입증한 것은 실로 역사적 쾌거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이익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역사가였습니다.
※출처: 백승종,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사우, 2019)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