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38)
홈런왕 김봉연②
예산 아끼기 위해 최소 인원만 출전
김봉연이 군산상고에 입학하던 1970년, 식욕이 왕성한 시기의 선수들에게 최대의 적은 ‘배고픔’이었다. 그해 운동장 확장공사 시작했는데 공사비 부족으로 선수들이 나서야 했고, 힘든 일 하면서도 점심은 국수로 때웠다. 쌀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김봉연은 “당시 선수들은 항상 허기진 몸으로 연습에 임했고, 이용일 야구부 후원회장(당시 경성고무 사장)의 학교 방문을 손꼽아 기다렸다”며 고달팠던 시절을 떠올렸다.
“(이용일) 회장님이 오시면 선수들에게 곰탕으로 포식을 시켜주셨죠.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그때를 얘기하려니까 침이 넘어가네요. 전국대회 본선에 진출하면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예산을 아끼기 위해 최소 인원만 시합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함께 고생한 동료 몇몇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이 회장님의 지원과 재학생, 시민들의 따뜻한 격려가 있었기에 선수들이 배고픔을 이겨내고, 집념과 투지로 뭉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봉연을 안타깝게 했던 것은 야구선수들의 수업 불참을 당연시하는 풍토였다. 그러한 분위기는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려는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전주북중 야구팀 시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교장의 다그침과 ‘야구를 해도 책을 가까이하라’는 큰형의 권언이 생각나 영어와 부기 수업을 받으려고 교실에 앉아 있으면 선생님들이 의아해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부터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며 낮에는 훈련을, 밤에는 타격연습과 독서를 열심히 했다.
“아, 야구는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군산상고 선수들은 야구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해가 다르게 성장한다. 전북 지역 유일한 팀으로 발전을 거듭하던 전주상고를 누르고 전북 대표권을 차지한다. 전국 대회에서도 강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전(全) 일본 고교야구선수권대회인 ‘고시엔(甲子園)’대회 70년도 우승팀 사가미(相模) 고교팀 초청 한국대표 선발전이 1970년 8월 23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 대회는 한일 양국의 고교야구 실력을 저울질하는 빅 이벤트에 출전할 대표팀 선발전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신출내기 군산상고는 예상을 뒤엎고 강호 동대문상고를 물리치는 기염을 토한다.
군산상고는 신예 김봉연을 마운드에 세워 동대문상고 타봉을 산발 5안타로 봉쇄, 9회 말 1점을 허용하는 반면, 공격에서는 7회와 8회에 김봉연의 2루타와 박만천의 좌전안타, 나창기의 적시타 등 안타 11개를 몰아치며 대거 6점을 뽑아 6-1로 낙승, 준결승에 진출한다. 이날 완투승을 기록한 김봉연은 최관수 감독을 만난 이후 야구에 눈을 뜨게 된다.
“최관수 감독님은 인천 동산고 시절 당대 최고봉으로 빠른 직구와 예리한 커브, 타자 앞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드롭(Drop)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명투수로 평판이 자자했던 분입니다. 3학년 때 ‘이영민 타격상’을 받아 야구 천재로 소문이 났고, 기업은행 에이스였던 분이어서 투타에 위력이 대단했죠. 감독님의 투구와 타격 시범 때마다 ‘아, 야구는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하고 놀라면서 몸과 머리로 익혔습니다.”
최 감독의 타격 폼은 초보인 김봉연에게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그대로 따라 하면 5할대 타율도 가능할 것 같았다. 방법은 거울 앞에서 어깨가 아프도록 흉내 내는 것. 노력은 헛되지 않아 얼마 후에는 최 감독의 위력적인 투구를 자유자재로 쳐낼 정도의 수준에 오른다. 실력이 괘도에 오르면서 4번 타자 자리도 확보한다. 야구의 진정한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왼쪽 어깨가 약간 처진 것도 그때 후유증이란다.
투타에 기량이 뛰어난 선수로 성장한 김봉연은, 무명에 불과했던 군산상고가 대한민국 고교야구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정상을 차지하는 데 주역이 된다. 유난히 무더웠던 1972년 7월 19일 오후 7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26회 황금사자기 부산고와의 결승 9회 말 역전 우승이었다. 그해 10월에는 전국 우수고교초청 군산상고-배명고 경기에서 장쾌한 아치를 그리는 두 개의 홈런을 작렬, 팀을 승리(4-0)로 이끌면서 미래 ‘홈런왕’을 예고한다.
‘촌놈’ 별명 얻은 후 인기 더 높아져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는 1972년 7월 황금사자기 우승에 이어 9월 대구에서 개최된 국회의장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강팀들을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 그해 2관왕에 오른다. 군산상고 에이스 김봉연은 대전고와의 결승에서 1회 초 1점만을 내주는 호투로 역전승(4-1), 최우수선수상을 받으면서 대학과 실업팀 감독들이 욕심내는 정상급 투수로 자리매김한다.
“스카우트 제의는 3학년(1972년) 여름부터 대학과 실업팀 등, 여러 곳에서 들어왔는데요. 저는 최관수 감독님이 투수로 활약했던 기업은행을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스승의 뒤를 잇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영어 교사였던 큰형이 ‘공부해서 교사가 되려면 연세대에 가야 한다’며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불과 옷만 싸 들고 서울로 올라갔죠. 그리고 그해 겨울 연세대 야구부에 합류해서 동계훈련에 들어갔습니다.”
경북고 에이스 남우식과 함께 초고교급 투수로 인정받던 김봉연은 1973년 봄 연세대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그는 시즌이 시작되자 투타에서 신기에 가까운 기량을 보여준다. 그해 5월 개최된 전국 대학야구연맹전 춘계리그에서 ‘영원한 맞수’ 고려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한다. 투구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자신이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것조차 몰랐단다.
“당시 배수찬 감독님이었는데요. 7회인가 8회인가 던지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데 배 감독님이 ‘기록을 너무 의식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했죠. 해서 무슨 말씀이냐고 했더니 ‘모르면 됐어, 지금까지 던진 것처럼 편하게 던져라’ 그러시더군요. 그때야 대기록 달성이 눈앞에 있다는 걸 알고 편하게 던졌죠. 그야말로 ‘공심(空心)’으로요. 그렇게 9회가 끝나자 경기장이 함성으로 가득하고, 기자들이 몰려오는데 정신이 없더군요.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었죠. 제가 1학년 신입생 투수이고, 연고전 역사상 첫 기록이어서 더했던 것 같습니다. ‘촌놈’이란 별명도 학교신문(<연세춘추>)에 기사가 실리면서 얻었죠. 기자들과 인터뷰 했는데, 잘생긴 얼굴은 놔두고, (웃음) 새집처럼 엉망이 된 머리와 염색한 작업복, 편하게 신고 다니던 고무신 등이 찍힌 사진만 보여주면서 ‘군산 촌놈’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축제 때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갔는데···. (웃음) ‘고려대로 가야 할 김봉연이 연세대에 와서 물을 흐리고 있다’는 말도 그 후 유행됐죠.”
‘촌놈’이란 별명이 널리 퍼질수록 김봉연의 인기는 상승했다. 그는 일찍이 국가대표 후보로 선발되는데, 연습이 끝나면 찾았던 도서실 앞에도, 강의실 앞에도 어떻게 생긴 ‘촌놈’인지 확인하려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화여대 후문 앞에 있었던 연세대 야구부 기숙사 앞에도 여성 팬들이 모여들었다니, 그를 ‘원조 야구스타’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
홈런왕 타이틀 가장 많이 차지한 선수
야구의 꽃이자 백미인 홈런. 김봉연은 1973년 가을 또 하나의 대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한다. 그해 대학 추계리그연맹전 동아대와 경기에서 대학야구 사상 최초로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한 것. 이어 1974년 대학야구 추계리그 홈런왕, 197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홈런왕, 한국화장품 소속 3년(1979~1981년) 연속 홈런왕에 오른다. 프로야구 원년(1982년)을 합하면 4년 연속 홈런왕에 등극한 셈이다.
육군야구단 시절인 1975년 백호기쟁탈 전국야구대회에서 한전과 건국대를 상대로 3이닝 연속 대형 아치를 그리면서 대망의 두 번째 3연타석 홈런을 달성한다. 홈런왕에 타점왕까지 차지, 거포의 진면목을 보여줬던 그의 3연타석 홈런은 그해 5월 20일 한전과의 경기에서 9회를 홈런으로 장식한다. 21일 건국대와 경기에서 1회 말 최한익과 랑데부 홈런, 3회 말 솔로 홈런을 쏘아 올려 팀 승리(4-2)에도 이바지한다.
1977년 11월 니카라과 마나과 경기장에서 개최된 제 3회 슈퍼월드컵(대륙간컵) 야구대회 결승전(한국-미국)에서도 2-3으로 리드 당하던 6회 초 동점 솔로 홈런으로 우승에 불씨를 댕긴다. 결과는 한국의 역전승(5-4). 이는 한국 야구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쾌거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1978년 7월 개최된 한미 대학야구 대회에서도 3개임 연속 장쾌한 홈런을 날려 홈런상(4개)과 타점상(9점)을 거머쥔다.
한국 야구의 세계무대 진출은 1975년 9월 몬트리올 대륙간컵 쟁탈 야구대회가 처음이었다. 8개 팀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3승 4패로 공동 4위에 머무른다. 11개 팀이 참가했던 1976년 11월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5승 5패로 공동 5위. 그리고 1977년 대륙간컵 대회에서 세계 정상을 정복한 것이다. 당시 야구전문가들은 김응용 감독의 박력 있는 작전을 치하했고, 김봉연은 유달리 국제경기에 강한 선수로 평가했다.
한국화장품 소속이던 1981년 9월 실업야구 후기리그 한전과의 경기에서 7·8·9회 연속 3점짜리 홈런을 작렬, 세 번째 3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며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작성한다. 아마추어 야구에 여섯 개밖에 없던 3연타석 홈런 중 절반을 차지한 것. 그중 3연타석 연속 3점 홈런은 최초이며, 한 게임 13루타 10타점 역시 희귀한 기록으로 아마와 프로 합해 ‘홈런왕’ 타이틀을 가장 많이 차지한 선수로 자리를 굳힌다. (계속)
※ 등장인물의 나이와 소속은 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