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대왕이 꿈꾼 나라 그리고 대통령의 조건
김명성의 '이슈 체크'
군소 후보를 빼고 네 개 정당 후보가 나섰다. 2강 구도다. 그것도 박빙이다. 득표를 과반 넘는 후보는 없다. 2~3% 차이로 당락을 결정지을 것이란 예측도 있다. 앞으로 후보 간 단일화, 정당 간 연정 여부도 관심을 끌 것 같다. 합종연횡이 당락을 결정짓거나 판세를 바꾸는 게임이 될 수 있다.
이재명의 당찬 추진력, 정권교체 여론에 올라탄 윤석열, 세 번째 도전하는 안철수, 진보의 불씨를 되살려야할 심상정. 이는 배신과 연대, 복종, 반란이 횡행했던 천 백여 년 전 시대를 언뜻 떠올리게 한다. 전주를 무대로 천하를 설계한 후백제 견훤대왕이 살아간 시대다. 천하통일, 구토(舊土) 회복, 평등세상 구현 의지를 펼쳐보이던 대왕의 생애를 되돌아보며 대통령의 조건을 따져보자.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역사의식', 제1 조건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뒤 국제 정세는 발해와 신라, 당나라가 만주대륙에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당나라는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그 때의 평양은 대동강변이 아니라 만주 요녕성에 있는 봉황성이다(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중국 사료를 못보고 대동강 변 평양으로 헛짚었다. 의도적일 가능성도 있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이민들의 부흥운동으로 나중에 북경 근처의 하북성 노룡현으로 더 밀려난다. 당나라는 곧 역사에서 사라진다.
중국 전체와 만주벌판은 송나라가 등장할 때까지 70여 년 간 5개 왕조와 10 개 지방정권이 난립하는 격변기를 맞는다(5대 10국 시대). 견훤대왕이 기개를 펼칠만한 시대다. 난세에 군사를 일으킨 견훤대왕은 말했다. 역사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 누대에 발흥한 까닭에 진한과 변한이 (마한을) 좇아 흥기했다(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이도학)”.
견훤대왕 보다 열 살 많은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인데 전성기 때에는 남으로는 오, 월에서 북으로 유, 연, 제, 노까지 중국 전역을 위협했다’고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밝혔다. 천 백여 년 전에 유학파 지성인의 안목이다. 당시에 통용된 상식이다. 사대주의와 일제에 의해 왜곡되기 전 생생히 살아있는 조상들의 집단기억이다.
견훤대왕은 후백제 땅에서 나라를 일으키지만 마한(고구려)을 계승해 대륙을 다스릴 새로운 왕조를 열려는 당찬 역사의식으로 무장했다. 두둑한 배짱과 철학이 느껴진다.
의자왕의 맺힌 한.... '치열한 동기', 제2 조건
견훤대왕은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백제 의자왕의 숙분(宿憤 쌓인 울분)을 설욕하지 않겠는가!(今予敢不立都扵完山, 以雪義慈宿憤乎)”라며 후백제 개국의 강한 동기를 밝혔다.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따라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 신라의 김유신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사실도 열거하며 의자왕의 맺힌 한을 깨끗하게 씻어내겠다고 울분을 토했다.
역사적으로 백제 사람들이 바라본 신라는 대수롭지 않았다. 일본 열도로 진출했을 때도 초기에 가야세력에서 백제계가 주름잡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분국(分國)들이 난립했지만 해상국가 백제로서 일본열도 장악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의 패전이후 부흥운동의 싹을 잘라버린 신라군의 군정. 그로인한 백제 사람들의 수난과 차별, 감시는 심했을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지역차별과 불평등, 양극화는 자존심 많은 백제의 울분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는 해방운동으로 풀어야 했다. 따라서 견훤대왕은 신라를 접수하고 왕건의 세력을 정벌한 뒤 발해와 연대하며 대동 사회를 만들어 나갈 웅지를 품었으리라. 견훤대왕은 당시 마한이 고구려로 계승되고 다시 발해로 이어진 역사의식에 투철했기 때문에 발해와 소통은 예정된 순서였을 것이며 중국 천하까지 넘보았으리라.
만주 대륙의 평양성... '경제영토 회복', 제3의 조건
견훤대왕은 왕건에게 조카라고 부르며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밝혔다.
“나의 바라는 바는 (만주 벌판의) 평양성 망루에 활을 걸어놓고 말에게 패수(난하 ‧ 대릉하 ‧ 요하. 북한 역사학계)의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오(所期者掛弓於平壤之樓飮馬於浿江之水)”
견훤대왕은 마한(고구려)을 승계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통치 구역이었던 중국대륙에서 만주벌판까지 영토 회복을 꿈꾸었다. 옛 땅을 되찾는다는 뜻을 지닌 고구려 언어는 다물(多勿)이다. 다물 정신으로 무장한 견훤대왕이었다.
고구려를 중시한 견훤대왕은 원대한 꿈을 가졌기에 국제 정세에 가장 밝았다. 그러기에 오, 월, 후당, 거란, 왜와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비슷한 시기에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산동 반도 일대 15개 주를 4대 60여 년 간 통치한 이정기 장군의 활약상도 익히 들었을 것이다.
장군은 당과 신라 · 발해의 모든 사신과 교류를 관장하는 직책에 있었다. 이정기 장군은 신라와 발해 사이에서 해상교통의 독점권을 가지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막강한 군사력으로 무너져가는 당나라와 맞서고 있었다. 견훤대왕이 최후의 승리자였다면 거란의 발해 멸망은 없었을 것이다. 천하는 만주의 발해, 중국 산동 반도로 이어지는 다물 벨트를 구축했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 역사의식-국정철학 경쟁이다
내년 3월 국민의 후보 선택은 출신 지역, 신분, 출마 횟수가 변수가 될 수 없다. 기울어진 언론의 보도 틀(frame)도 변수가 되어선 안 된다. 이 나라를 5년 동안 도맡을(수탁) 후보의 국정철학과 역사의식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무조건 갈아치우자는 식의 정권교체나 진보-보수의 이데올로기(2강 후보는 모두 보수다), 정치 보복성 감정 이입은 더더욱 아니다. 그동안 19대에 걸친 대통령이 대부분 독재와 무능으로 점철된 아픈 역사임을 감안할 때 후보의 국정철학은 너무 중요하다. 견훤대왕의 지혜를 끌어다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첫째, 견훤대왕 같은 역사의식이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어떤 역사를 계승할지 스스로 깊게 생각하고 유권자들에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는 청산 안 된 우리 역사가 떠안고 있는 짐이다. 그것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수반한다. 역사의식 없는 후보는 영혼 없는 자와 같다.
둘째, 견훤대왕 못지않은 강력하고 치열한 출마 동기다. 그게 약할 때 가문의 영광이나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당장 포기해야 한다. 출마 동기는 민족적이고 시대적 사명을 띠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후보라면 갖추고 보완해가야 한다.
셋째, 분단국가로서 통일의 디딤돌을 놓는 자, 또 영토회복(경제영토)이 후보의 소명이어야 한다. 통일을 향한 대화, 소통, 협력, 교류, 그리고 한발 더 무역과 노동자 수출입까지 나아갈 구체적인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천하를 넘본 견훤대왕의 안목이다.
이러한 역사의식과 국정철학을 놓고 벌이는 경쟁일 때, 국민들은 후보의 가족문제나 국기문란까지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다. 버림받고 있는 언론도 이런 기준으로 취재경쟁을 벌일 때, 믿음을 되찾을 수 있다. 유권자들의 멋진 선택과 후보의 선전을 기대한다.
/김명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