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36)

‘스마일피처’ 송상복②

2021-11-01     조종안 기자

기적 같은 역전 우승... 영광 뒤에 오는 상처

제26회 황금사자기 대회 입장식. 군산상고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는 모습(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7월 19일 황금사자기 결승전(군산상고-부산고) 9회 말 1-4로 뒤진 상황에서 선두타자 김우근이 산뜻한 안타로 역전승의 전주곡을 울린다. 1사 만루 찬스에서 김일권의 밀어내기 1점과 양기탁의 2점 적시타로 동점이 되면서 운동장은 광란의 도가니가 된다. 이어 등장한 김준환의 기적 같은 끝내기 안타는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응원단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면서 ‘역전의 명수’를 탄생시켰다.

그날의 명승부는 군산상고를 호남야구 중흥의 선봉장으로 떠오르게 했다. 그때부터 송상복에게 ‘스마일피처’란 애칭이 따라다닌다. 선수들에게는 각지에서 팬레터가 날아들었다. 팬들은 남녀노소 직업을 가리지 않았다. 프로야구 원년 도루왕 김일권은 “동료 중 송상복이 가장 많은 팬레터를 받았다, 팬들의 열기는 부러울 정도였다”고 귀띔한다. 그럼에도 송상복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저를 가리켜 위기에 처해도 웃으면서 투구하는 스마일피처라고 하는데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평소 내성적인 성격으로 끝까지 침착하게 던지려고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다진 것이지, 미소를 짓거나 웃으면서 투구를 하지 않았거든요. (고개를 갸웃거림)

팬레터는 여학생에게 많이 받았는데, 그게 화근이었어요. 팬과 선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괴소문 때문에 두고두고 시달렸습니다. 그해 한일고교 야구 끝나고 오른쪽 옆구리가 결리기 시작하더니···.(한숨) 결국 ‘늑간신경통’ 진단을 받았죠.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심했는데요,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여자 때문’이라는 괴소문이었습니다. 특히, 남이 해도 말려야 할 야구 관계자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참담하더라고요. (한숨)”

가슴에 태극마크 다는 것이 꿈이었던 송상복은 낙심하지 않고 양·한방 치료를 계속한다. 3학년 여름이 지나면서 그런대로 건강이 회복된다. 몸은 좋아졌으나 스카우트제의를 받지 못한 그는 졸업을 앞두고 대학과 실업팀으로 진출하는 동료들을 지켜보며 비애감을 느껴야 했다. 진로는 막히고,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졸업 후에는 건축업을 하는 친구 아버지 권유로 주택건축 현장 막일꾼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채소행상 하는 어머니를 보며 빈둥빈둥 놀고먹을 수는 없었다.

모교 감독으로 야구 지도자 생활 시작

군산상고 선수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군산 시민들(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송상복은 1974년 6월 모교인 남초등학교에서 야구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오전에는 공사판에 나가고, 오후에는 꼬마 후배들을 열심히 지도하였다. 가난한 동네이다 보니 운동화 한 켤레 값이 없어 야구를 포기하는 학생이 많았다. 야구부 운영이 어렵게 되자 교장선생님(채규거)은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고물 타이어를 불에 녹여 닳아 해진 야구공을 땜질해주는 등 선수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교사들은 형편이 어려운 학부모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열의를 보였다.

조계현 LG트윈스 2군 감독을 비롯해 장호익, 백인호 등이 송상복 감독이 지도했던 선수들이다. 그는 자신의 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아이들 지도에 집중한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꼬마 후배들이 1976년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따낸 것. 그러나 선수들이 출전하는 날 입대하는 바람에 우승 소식은 군대에서 받아봐야 했다. 조계현, 장호익 등이 깨알같이 적어 보낸 편지는 기쁨의 눈물과 함께 지도자의 보람을 안겨줬다.

1979년 1월 제대와 함께 남초등학교 감독으로 복귀한다. 그해에 지금의 아내(최막래)와 결혼식도 올린다. 삼학동 단독주택에 딸린 자그만 셋방을 얻어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민다. 최씨는 전국체전 준우승의 전적을 가진 군산여고 연식정구 선수 출신으로 고교 때부터 사귀어오다 결혼에 골인한 것. 1972년 옥구군(군산시) 보건소에 취업한 최씨는 결혼 전부터 송 감독 뒷바라지 해주었고, 노환으로 병약해진 시어머니도 극진히 모셨다.

아내 도움으로 만학의 향학열 불태워

체육에 관심이 많았던 김삼룡 부총장 추천으로 1981년 원광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자리를 옮긴다. 1983년에는 코치직을 계속 맡으면서 원광대 사범대 체육교육과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 늦게나마 향학열을 불태운다.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체육 지도자상에 심취하며 1987년 3월 졸업장을 받는다. 만학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에는 결혼 후에도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살림을 도맡아온 아내의 도움이 컸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전남(광주)의 모 중학교에서 감독초빙 제의가 들어온다. 기회가 왔다 싶었는데 일은 다시 꼬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급하다고 해서 원광대 코치직을 사임했는데, 지역 출신이 아니어서 동문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감독초빙이 철회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백수건달이 되고 말았던 것.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내를 대할 면목도 없었다. 무엇을 하든 수입을 올려야겠기에 화물트럭 조수와 운전기사로 2년여를 보낸다.

1989년 늦가을 모교인 군산상고 감독을 맡는다. 절치부심의 자세로 팀을 재정비, 이듬해 전국 규모 대회에 4회 출전하여 제45회 청룡기대회 3위에 오르는 등 전년보다 훨씬 나은 성적을 거둔다. 창단 이래 최초로 연세대 2명 고려대 1명, 원광대 1명을 특기생으로 진학시킨다. 그럼에도 전국대회 전적 부진을 이유로 부임 13개월 만에 해임되는 쓰라림을 맛봐야 했다. 야구부 운영권을 놓고 어른들 사이에 벌어진 치졸한 파워게임의 희생양이 됐던 것. 전후사정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였다.

군산시의원 출마... 당선 후유증

군산시의원에 당선되고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는 송상복(1991년)(출처: 동아일보) 

배신감에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날 야구 선후배 몇 명이 찾아온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1991년 3월 26일 치러지는 군산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한다. 정치에 관심도 없고, 기초의회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 사양해도 막무가내. 군산상고 야구선수 학부모들까지 찾아와 ‘선거 비용은 우리가 부담할 터이니 야구 지도자로서 명예회복도 하고, 지역 체육 발전에 앞장서 달라’는 진지한 권유에 용기를 얻어 출마의 뜻을 굳힌다.

“왕년의 야구 명문 군산상고 ‘스마일피처’ 송상복 후보(36)와 군산시 야구협회장 강선국 후보(57) 등 2명의 야구인이 경합을 벌여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던 전북 군산시 오룡동 지역 선거에서는 송상복 후보가 강선국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이 확정. 송씨는 개표결과 총 투표자 수 2천 5백78명 가운데 64.6%인 1천 6백66표를 획득. 8백45표를 얻는 데 그친 강씨에 거의 더블스코어차로 압승... (아래 줄임)” -1991년 3월 27일 자 <경향신문>

야구의 도시에서 송상복-강선국 두 후보의 대결은 시민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 중 송 후보는 야구 선후배와 친지, 군산상고 학부모까지 자원봉사자로 나서줘 강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될 수 있었다. 당선의 기쁨도 잠시. 이번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품위유지비’가 발목을 잡았다. 시의원 배지는 그냥 달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청첩장, 초대장, 부고 등이 일주일에 5~6건씩 날아오는데 정신이 없더군요. 생소한 이름도 있지만, 대부분 지역구 주민들이어서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찾아다녔어요. 수입은 없고, 아내가 부조금 대느라 고생 많이 했죠. 임기마치는 해에 남은 것은 빚뿐이더군요. 어떻게 하겠어요. 공직생활 26년 4개월 만에 퇴직한 아내 퇴직금으로 빚 청산하고 선거와는 인연을 끊었습니다. 지금도 선거 얘기가 나오면 벌레처럼 징그럽게 느껴집니다.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요.”

그는 아내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1996년 조그만 공장에 취직한다. 열심히 노력한 보람이 있어 7~8년 전 독립해서 지금은 자그만 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종업원은 7~8명, 경제적으로 여유를 찾을 만하니까 이번에는 가슴 부위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작년 12월 초 심장 수술을 받고 약을 복용 중이라 한다.

어느덧 환갑을 맞이한 스마일피처 송상복. 한 많고 지난한 삶을 살아온 그는 “인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하겠습니까. 건강한 몸으로 아내와 오순도순 지내는 것이 가장 큰 낙이자 희망이죠.”라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계속)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책 및 나이는 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