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살해한 '낭인 깡패' 따르는 역사학계

김명성의 '이슈 체크'

2021-10-30     김명성 논설위원

남북 분단은 역사연구 방향에도 뚜렷한 분단을 드러냈다. 남한은 조선총독부 연사연구 방향을 철저히 추종하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옛 기록인 역사서의 원전(原典)을 토대로 총독부의 날조 행위를 까발리며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갔다. 북한은 역사서 원전에 밝은 석학들을 북으로 끌어 모았다.

그들은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토대로 조선총독부의 ‘장난질’을 하나씩 들춰냈다. 그러나 남한은 일제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소속 이병도를 중심으로 거짓 역사를 사실로 굳혀갔다.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 학자들까지 서울대로 수시로 불러 가르침을 받았다. 패전으로 실의에 빠진 일본인 역사 날조 행위자들은 뜻밖의 대접에 신이 났다.

일본인 '낭인 깡패'의 기막힌 발상 이어가기

암살단은 명성황후 살해 작전 암호명을 ‘여우 사냥’으로 불렀다. 황후를 처단해야할 ‘여우’로 점찍었다. 범행에는 일본인 낭인 자객까지 동원됐다. 당시 낭인 자객들은 민간인 신분이며 식민지 경영에 달려든 자들이다.

치밀한 계획아래 경복궁에 침투한 폭도들은 명성황후를 찾아내 잔인하게 죽인 뒤 용모가 비슷한 궁녀 세 명도 죽였다. 혹시 명성황후가 살아서 도망갈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KBS2TV 드라마 '명성황후' 장면(캡쳐)

낭인 깡패 중 하나가 당시 30대의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년)이다. 그는 나중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협의원이 되었으며 책을 내기도 했다. 그의 책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조선침략을 역사와 결부시키기 위해 이 땅의 지명을 일본 지명과 연결시키는 날조 작업을 주도했다.

지금 일본의 조선침략은 옛적(369~582년) 남부지방을 다스렸던 식민지 통치의 복원이라는 희한한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핵심은 ‘천황’이 다스린 일본 땅(임나)을 지금의 조선 땅(가야)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남한 역사학계, 쉬쉬하며 낭인 깡패 따라가기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 낭인깡패들의 역사인식은 명약관화하다. 조선통치의 정당성을 역사에서 찾은 것이다. 조선의 남부지방은 2백년간 일본이 통치했다는 것(임나일본부)이고 조선의 북부지방은 중국이 4백년간 통치했다는 것(한사군 통치)이다. 조선의 역사는 식민통치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각인시킨 게 조선총독부의 역사정책이다.

낭인 깡패의 기막힌 발상은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1904~1992년)를 거치면서 정교하게 가다듬어졌다. 총독부 직속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며 해방 후 서울대교수가 된 이병도는 정설로 굳혀갔다. 그리고 지금의 중진, 소장학자들까지 알든 모르든 낭인 깡패의 추종자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

소장학자들까지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서의 기록인 원전은 덮어 놓은 채 일본인들의 연구논문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원전 해석까지 식민지 프레임(frame)으로 틀지어 놓았다. 그러나 낭인 깡패에서 시작된 날조행위는 원전을 제대로 보면 금방 뒤집혀진다. 식민사학 체계는 모래 위에 쌓아놓은 누각과 같다.

북한은 원전(原典) 연구로 총독부 날조 낱낱이 밝혀

북한의 역사연구는 단재 신채호 선생, 위당 정인보 선생의 연구방향을 따른다. 신채호 선생은 성균관 박사출신이다. 정인보 선생은 상해에서 동양학을 전공하고 한학을 두루 섭렵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 이전에 원전에 밝은 학자들이다.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한 중국 역사서를 두루 보았기 때문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한나라가 위반조선을 무너뜨리고 4군을 설치했는데, 위치가 하북성 일대의 중국 땅이다. 지금의 북경 주변이라고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일제 학자들은 한사군 위치를 평양 일대의 북부지방 안에 가뒀다. “남쪽은 일본 식민지, 북쪽은 중국 식민지로 시작된 역사가 조선역사다”라고 주입시키기 위해서다. 북한 학자들은 원전에 입각해 날조된 역사를 바로 잡았다. 총독부의 음모는 하루아침에 들통 났다.

홍릉(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임나일본부설 역시 북한의 역사연구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가야계가 주축이 돼 일본에 진출해 세운 나라가 임나임을 밝혀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본열도 진출 사실도 밝혀냈다. 일본 역사학계는 충격에 빠졌다. 반면 남한은 북한의 연구 성과를 애써 외면해야 했다. 북한의 고대사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면 조선총독부가 수립한 남한 역사체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의 연구 성과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에 급급했다. 남한 역사학계는 비겁했다.

조선총독부의 화려한 부활, 남한 국가기관 접수

해방이 되자 조선총독부는 해체됐다. 그러나 총독부가 수립한 날조된 역사는 주요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확산돼 갔다. 조선총독부에서 봉급 받으며 역사 날조에 힘쓴 이병도 중심의 ‘총독부 학파’가 국가기관을 모두 접수했기 때문이다.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가기관이 대표적이다. 사실상 조선총독부가 해방 후에도 이 국가기관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총독부 학파’는 한사군 한반도북부설, 임나일본부설을 두 축으로 남한 역사학계를 끌어가고 있다.

특히 ‘임나=가야’라는 날조된 논리를 바탕으로 고대 영호남 지방을 일본 식민지 통치(369~582년) 지역으로 굳혀가고 있다. 가야 영역이 영남을 넘어 지금의 호남까지 확대된 고고학적 연구 성과도 식민통치 구역으로 바꿔치기 하고 있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낭인깡패가 그 주장의 첫 시조다. ‘일본 천황’이 다스린 임나가 바로 남부지방이고 전북의 남원, 장수, 임실 땅도 통치구역에 포함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젊은 학도들의 피땀 흘린 고고학의 발굴조사 성과마저 국모 살해범의 영전에 바치고 있는 셈이다. 해방된 지 76년이 지났음에도 역사학계는 조선총독부의 통치 아래 놓여 있다. 실로 통탄스런 일이다.

‘총독부 학파’ 청산으로 역사의 독립 이뤄야

남한 역사학계가 계승한 조선총독부 역사관은 흔들릴 기미가 없다. 총독부 역사관이어야만 직업인으로서 교수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학문적 권위가 실리는 학위도 따낼 수 있다. ‘총독부 학파’가 강고한 카르텔을 이어가는 이유다. 문제는 정부 산하 교육부, 한국사 편찬을 총괄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역사왜곡에 대응한다는 동북아역사문화재단을 모두 이들이 접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자료사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이 날조된 역사를 정설로 굳히고 있다. 역사연구 분야에 친일매국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조선총독부에서 일한 이병도는 서울대 교수로, 교육부 장관으로 승승장구하며 역사 날조를 굳혔다.

그 제자들과 학설 추종자들은 남한의 역사학계를 이어가고 국가기관에서 날조된 역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게 남한의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진정한 독립은 총독부 학파가 청산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역사 분야 남북 교류와 시민 역사 의식이 해답

남한의 ‘총독부 학파’를 타파하는 길은 역사 분야의 남북 교류에 있다. 북한의 고대사 연구 성과와 남한의 ‘총독부 학파’간 지속적인 토론과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일본인 학자 논문과 원전을 중시한 북한 석학들의 연구 간 소통의 결과는 어떠할까? 남한의 역사학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벌써부터 북한 학자들의 고대사 연구 성과를 인용한 전문가들에게 이념의 덧을 씌우고 있다. 남한의 학자로서 고조선 연구를 집대성한 윤내현 교수가 대표적이다. 하버드대에서 수학한 중국 고대사 전공학자까지 용공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윤 교수의 연구 성과로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제가 날조한 역사를 시민들이 올바르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남한 학자들이 저항에 부딪친다. 그들은 원전을 읽는 시민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혁명적인 변화다. 분단에 기생한 ‘총독부학파’의 말로가 보인다. 이 땅에 조선총독부가 수립한 역사관은 멸절되어야 한다. 교육부와 역사 분야 국가기관에서 버젓이 전문가를 자처하는 친일 매국학자들도 색출해내야 한다. 그들에게 한국고대사의 주류가 아닌 ‘총독부 학파’의 일개 집단으로 제자리를 찾아주면 된다. 

/김명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