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35)

‘스마일피처’ 송상복①

2021-10-25     조종안 기자
‘스마일피처’ 송상복(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타지역 사람들이 군산(群山)을 이야기할 때 ‘세계 최장 새만금방조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빵집 이성당’, ‘채만식 소설 <탁류>’ 등 넷 중 한두 개는 꼭 꼽는다. 놀랍게도 10명 중 3~4명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앞세운다. 그들에게 ‘역전의 명수 중 누구를 아느냐’고 물으면 ‘스마일피처(송상복)’는 꼭 들어간다.

재미있는 현상은 송상복은 몰라도 스마일피처는 기억한다는 것이다. 송상복은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전(군산상고-부산고)에서 아리송한 미소로 9회까지 마운드를 지켜내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해 가을 건강 악화로 웃음을 잃는다. 졸업 후에는 건축현장 막노동꾼, 모교 야구감독, 뒤늦은 대학진학, 트럭 조수, 군산시의회 의원 등 험난한 인생 역정을 걸어왔다. 요즘도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아버지 얼굴조차 모르고 성장

스마일피처 송상복(宋相福). 그는 1953년 봄 군산시 서흥남동 산동네에서 막내(3남 2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은 목선(木船) 한 척을 부리는 어엿한 선주였다. 그럼에도 살림은 항상 쪼들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 할까,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어머니는 영세민 취로사업장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노임 대신 받아오는 밀가루에 5남매가 매달려 살았다.

“(혀를 끌끌 차며)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숨을 고른 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벌어서 여섯 식구가 먹고살았죠. 쌀밥은커녕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보릿고개 시절이었다고 하지만, 유달리 어렵게 살았어요. 밀가루 한 봉지가 하루 식량이었거든요. 물을 흥건하게 부어 수제비나 국수를 끓여 먹었는데, 그것도 성찬이었죠. 끼니를 거르는 날도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사진으로도 뵌 적이 없어요. (한숨)”

귀여움을 독차지해야할 막내 송상복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성장한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난 빈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크게 느껴졌다. 외로움과 가난의 음습한 그림자는 어린 상복을 괴롭혔다. 가난에 시달리다 보니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추억은 신문지로 둘둘 말아 부뚜막에 올려놓은 칼국수 다발밖에 없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생각할 때마다 이 모습 저 모습으로 바뀐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와 인연

1960년대 초 남초등학교 운동장, 산동네 초가들이 눈길을 끈다(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송상복은 1962년 봄 군산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잘못된 호적을 서둘러 정정해준 형수 덕분이었다. 이듬해 집에서 가까운 남초등학교로 전학한다. 새로 사귄 급우들과 시멘트 종이를 접어 동네야구를 시작한다. 4학년 때는 김용태 야구부 감독의 눈에 띄어 처음으로 배트와 글러브를 착용한다. 야구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야구가 밥보다 좋았다. 얼마나 좋은지 하늘로 날아가는 공도 점프해서 잡을 것 같았다.

“신문지는 귀했고, 비료 포대나 시멘트 포대로 글러브를 만들어 ‘종이 야구’를 했는데요. 흥남동 산동네 아이들, 오룡동 말랭이에 사는 아이들, 미원동 피난민촌 아이들, 삼학동 모시산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모여서 시합을 했습니다. 모두 가난한 동네 애들이었지만 실력은 대단했죠. 게임도 프로야구처럼 돌아가면서 리그전을 펼쳤구요. (웃음) 그렇게 하다가 김용태 감독님 눈에 들었던 것이죠.”

처음 포지션은 1루수. 몇 달 후에는 감독 제의로 투수 마운드에 오른다. 그해 가을 전남 여수에서 개최된 영호남 초등학교 야구대회에 출전해서 우승한다. 다음 해에도 같은 대회에서 연이어 우승한다. 어린 싹들의 기량을 눈여겨본 당시 전북야구협회 이용일 회장과 군산남중·상고 김병문 교장은 송상복, 김일권, 양종수, 조양연, 김기철 등 남초등학교 선수 11명을 특기생으로 군산남중에 입학시켜 1968년 야구부를 창단한다.

군산남중 야구팀은 창단 첫해부터 전국대회에 출전했으나 우승기는 너무도 멀리 있었다. 그래도 4강 대열에는 몇 차례 올라 전국 수준으로 인정받는다. 특히 송상복, 김일권, 양종수는 그때부터 군산상고 야구팀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꼽힌다. 3학년이 되자 다른 지역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 졸업을 앞두고는 더욱 잦아졌다. 하지만 남초등학교 출신 11명은 스카우트 손길을 외면하고 1971년 군산상고(야구부 4기)에 진학한다.

1학년 때 유망주로 떠올라... 대망의 결승 진출

1971년 11월 군산 제일극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왼쪽에서 세 번째 송상복(출처: 군산 야구 100년사)

지긋지긋한 가난은 고교에 진학해서도 송상복 주위를 유령처럼 맴돌았다. 아침저녁 끼니를 국수와 수제비로 때웠다. 생활은 고달팠지만 고마운 급우들이 있기에 용기를 잃지 않고 연습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집안 형편을 아는 급우들이 번갈아 가며 도시락을 두 개씩 준비해왔던 것. 맛이나 보라며 간식용 빵을 건네주는 친구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자신감을 얻은 송상복은 1학년(1971년) 대통령배 대회부터 릴리프로 등판, 미래 유망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무리한 역투로 오른손 중지와 엄지발가락에 상처를 입고 슬럼프에 빠진다. 2학년 때는 최관수 감독 제의로 투구자세를 바꾼다. 최 감독이 지금까지의 오버스로는 몸에 무리가 따르니 사이드스로나 언더스로로 바꿔보라고 권했던 것. 그 후 대회 때마다 날카로운 커브와 사이드스로로 상대 팀 타자들을 제압한다.

1972년 7월 황금사자기 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한 군산상고는 대회 3일째(14일) 경기에서 치열한 난타전 끝에 경북지역 예선 우승팀 영남고를 8-6으로 물리친다.

준결승에 진출한 네 팀(군산상고, 경남고, 마산상고, 부산고)은 우연히도 항구도시 팀들이었다. 그중 경남고는 지난해(1971년)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다승 기록(우승 다섯 번, 준우승 세 번)을 보유한 강팀으로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군산상고는 준결승전(18일)에서 경남고를 만나 송상복이 완투승(3-1)을 거두면서 결승에 진출한다. 경남고를 꺾는 순간 군산상고 응원단은 마치 우승기라도 쟁취한 것처럼 손을 들어 환호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관중 대부분 경남고 승리를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저력을 지닌 경남을 물리친 것은 최대의 난관을 통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는 이변이었다. 중앙 무대에서 기지개조차 제대로 켜지 못하던 호남 야구가 강팀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는 순간 관중석은 아우성에 가까운 함성으로 가득했다. 스탠드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서도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다방과 거리의 전파상 앞에 삼삼오오 모여 TV 중계를 통해 군산상고의 결승 진출을 지켜본 군산 시민 100여 명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둬 서울행 고속버스 승차권과 비행기 탑승권을 단체로 구입하고 <동아일보> 군산지국에 서울운동장 야구장 입장권 예매를 부탁한다. 전직 언론인 채규이(78)씨 추억담을 들어본다.

“업무 끝나고 프로펠러 달린 비행기 타고 올라간 사람도 많았지. 대단한 열정이었어. 근무 중에 응원하러 갈 수는 없잖아. (웃음) 호남고속도로가 2차선일 때여서 고속버스도 서울까지 4시간 넘게 걸렸거든. 대한항공 군산영업소가 중앙로 경찰서 옆에 있었는데 20명이 넘게 예약하니까 시간에 맞춰서 뜨더라고. 그러니 비행기를 전세 낸 것이나 다름없었지.

군산시 의원도 하고, 의장도 지낸 이만수 있잖아. 당시 대학생이던 그 친구가 앞으로 나오더니 불꽃처럼 응원전을 펼치면서 분위기를 잡더라고. 말하자면 응원단장이었는데, ‘스마일피처 파이팅!’을 얼마나 멋지게 외치면서 리드하는지, 처음엔 ‘우~’하고 비웃던 부산고 응원석에서 박수를 보내고 호응하는 거야. 군산상고가 우승하고 이튿날 새벽 군산에 도착했는데 경찰 백차가 전주 IC부터 군산까지 우리를 에스코트했다니까. 지금 생각해도 굉장했어.” (계속)

※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책 및 나이는 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