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처음과 끝’에서 배우는 지혜
만언각비
‘하늘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천자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마지막은 어떻게 끝날까. 아다시피 바로 ‘위어조자 언재호야(謂語助者 焉哉乎也)’다. 어조(語助)라고 일컫는 글자에는 언(焉), 재(哉), 호(乎), 야(也)가 있다는 뜻이다. 문장의 토씨라고 일컫는 언, 재, 호, 야는 그야말로 말의 뜻을 도와 말을 만드는 데 쓰인다. 실질적인 뜻이 없고 다만 다른 글자의 보조로만 쓰인다. 그런데 이 보조자들의 존재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글귀를 성립시키고 말을 만들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글자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사 이치가 그렇다. 어느 영화나 드라마에 주연들만 있던가. 반드시 조연이 있다. 때로는 조연들이 감칠맛 나는 역할로 스토리를 더 맛깔스럽게 하지 않던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시작을 알면 끝이 궁금해진다. 끝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시작의 의미도 제대로 알게 된다. 반면 끝을 알지 못하는 시작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대개 용두사미로 끝난 일이 잘된 경우가 있던가.
모든 것은 일어나서 사라진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다. 생성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언재호야(焉哉乎也)’는 조연이지만 주연급 역할
어조사는 허자(虛字), 허사(虛辭)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 허(虛)자가 들어갔을까? 아무 역할이 없어서? 아무 구실을 못해서? 그렇지 않다. 그저 뜻이 없거나 의미를 갖지 않아서다. 그러나 그 역할은 막중하다. 문장을 이루는 데서 지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언, 재, 호, 야 이들을 빼면 문장의 완성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혼란스러워진다.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답답해진다. 몽롱해질 수 있다.
그만큼 중요한 글자다. 한자에는 조사가 매우 많지만 대표적으로 네 자만 적었다. 조사(助詞)가 아니라 조사(助辭)라는 점은 유념하자. 한말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창강(滄江) 김택영은 어조사를 제대로 쓸 때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말한다. 창강은 “지극히 묘한 신비한 이치가 어조사에 있다”며 『상서』나 『주역』보다 『사기』의 문장이 뛰어난 것은 사마천이 다양한 어조사를 적재적소에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언재호야’는 마무리를 장식하는 구절이라고 해서 서화가들은 낙관에 쓰는 인장에 곧잘 ‘언재호야’를 새기기도 한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선생은 조선시대 최고 학자 가운데 한 분이다. 그의 일화를 보자.
고봉이 다섯 살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맨 첫 문장인 ‘천지현황(天地玄黃)’을 가지고 일곱 살까지 배웠지만 모른다고 했다. 화가 난 서당 훈장은 소를 끌어다 기대승 앞에 세워놓고 고삐를 힘껏 잡아 위로 쳐들며 ‘하늘천’ 하고, 아래로 세게 잡아 내리며 ‘따지’ 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훈장이 고삐에서 손을 떼고 나서, ‘하늘천’ 하니까 소가 머리를 위로 올리고, ‘따지’ 하니까 머리를 아래로 내리는 것이었다.
훈장이 기대승에게 말하기를 “이것 봐라! 소 같은 짐승도 몇 번 가르치지 않았는데 ‘하늘천’하면 머리를 하늘로 올리고 ‘따지’하면 머리를 땅으로 내리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사람이면서 ‘천지현황’을 삼 년이나 가르쳤는데도 모르고 있으니 소만도 못하구나”라며 꾸짖었다.
그러자 기대승은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삼년독(三年讀)하니, 언재호야(焉哉乎也)를 하시독(何時讀)고” 하고 읊었다. 즉 “첫째 줄 ‘천지현황’을 삼년 읽었으니 맨 끝의 ‘언재호야’를 어느 때나 읽을고”라는 뜻 아닌가. 기대승은 이미 천자를 다 외우고 있었던 거다. 훈장은 기대승이 글 읊는 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너는 벌써 천자를 다 읽고 있었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너를 소만도 못하다고 했구나” 하며 미안해했다고 한다.
왜 기대승이 천자를 다 읽고 있으면서 천지현황에 대하여 3년 동안이나 그토록 모른다고 했을까? 천자문을 배우면서 글자만 외웠던 게 아니라 ‘천지현황’에 담긴 뜻을 알고자 했던 것 아닐까. 이 ‘천지현황’은 비록 네 글자이지만 글을 많이 배운 어른도 알기 어렵다. 무조건 외우는데 그치지 않고 깊은 이치를 알려고 했던 어린 기대승의 자세야말로 공부하는 기본이 아닌가. 그러기에 뒷날 훌륭한 학자로 성장했던 것은 아닌지.
『천자문』은 주흥사(周興嗣)가 만들었다. 중국 양(梁) 무제(武帝)가 신하 주흥사에게 시켜 만든 책이다. 어느 날 무제는 주흥사에게, 4글자씩을 한 구절로 묶어 모두 250개의 문장을 완성하도록 명했다.
주흥사는 고민에 빠졌다. 1000개의 한자 중 992개까지는 어찌어찌 문장을 만들어냈는데, 마지막 남은 8개 글자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끙끙 앓았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깜빡 졸았다. 절실하면 꿈에 계시가 나타나는가. 마침 꿈속에서 나타난 한 도인이 귀띔을 해줬다. “다른 글자를 돕는 글자, 즉 어조사에는 언(焉)과 재(哉)와 호(乎)와 야(也)가 있다”고.
뜻 없는 글자가 뜻 가진 글자를 좌지우지
이렇게 해서 비로소 탄생한 것이 『천자문』의 마지막 문장 ‘위어조자 언재호야’다. 꿈속에 도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주흥사는 이미 죽은 몸이 됐을 터이다. 당시 주흥사는 무제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혀 죽음의 형벌을 기다리는 절박한 신세였다.
그러나 주흥사의 학문을 아까워한 무제가, 만약 하룻밤 동안에 천자를 완성하면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주흥사는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죽을힘을 다해 문장을 지었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 혹은 백두문(白頭文)이라고도 부른다.
사언고시 250개는 아주 그럴싸하다. 인간훈, 처세훈, 자연이치, 우주 섭리 등을 담았다. 고루하고 인순고식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그처럼 ‘생각의 틀’을 짜낸 주흥사는 여간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천자문을 샅샅이 살피면 이런 재미난 얘기가 많다. ‘천지현황’은 『주역』 건괘 문언에서 따온 것이다. 이와 대를 이루는 ‘우주홍황’은 『시경』과 『법언』의 어휘를 빌려 왔다. 이렇듯 천자문의 글귀는 옛 문헌에서 차용한 게 많다. 그런데 이를 간단히 여겨 ‘별 보잘것없는 글’이라니.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소리다.
더구나 아무리 996자를 알아도 마지막 네 글자 ‘언재호야’를 모른다면? 글을 읽을 수도 없을뿐더러 쓴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문장의 완성은 조사로만 가능하니, 결국 문장은 조사가 권력을 쥐고 있다. 뜻 없는 글자가 뜻을 가진 글자를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어디 문장에서만 그러랴. 인생에서도 그러지 아니한가. 글에서든 삶에서든 힘의 원리는 매한가지다. 『논어』는 군자(소인의 반대)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책이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여러 가지 지혜를 알려주는 책이다.
『논어』의 첫 구절은 학(學)자로 시작했다. 학(學)은 삶의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만약에 종교와 관련된 책이었다면 아마 믿을 신(信)자로 시작했을 거다. 하지만 『논어』는 ‘믿으라’고 시작하지 않고 ‘배우라’고 시작한다. 그렇다면 『논어』의 마지막은 어떻게 끝날까?
이렇게 끝난다. “천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禮)를 알지 못하면 (사람 행세를 하며)설 수 없으며, 말(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요왈(堯曰) 편>
알고자 하면 배워야 한다
지혜의 보물 창고 『논어』의 마지막 세 문장이 모두 ‘부지(不知)’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렇게 끝난 데는 바로 공자의 단도직입적인 가르침이 담겨있다. 독자에게 내주는 일종의 숙제다.
‘부지명(不知命)’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유력 인사들이나 가장들이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과욕· 과신· 과속으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안겨주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모두 명(命)을 몰라서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남편이 아내를 죽인다. 도무지 앞과 뒤, 좌우가 없다. 예(禮)를 몰라서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모르고 막말이 난무한다. 내 마음에 안들면 무조건 ○○○ 쌍욕지거리다. 언(言)을 몰라서다.
이렇듯 공자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그릇됨(분수)을 정확히 알고 살아가라는 메시지다. 여기서 우리는 널리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너의 무지함을 알라)”는 메시지와 공자의 메시지가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연인가. 우연이겠지만 성인들의 가르침은 매한가지다. 하나로 통하고 있다는 거다. <노자(老子)>에 나오는 다음 구절도 시작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아름드리 큰 나무도 털끝만 한 씨앗에서 싹이 트고, 9층의 높은 누대도 한 무더기 흙을 쌓는 데에서 시작하며, 천리길도 발밑에서 시작된다.(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신종여시 즉무패사(愼終如始 則無敗事)’는 <도덕경> 64장에 나오는 구절로, 무슨 일이든 ‘마지막에도 시작할 때처럼 신중하면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는 뜻이다. 노자는 처음과 끝을 매우 중요시한 철학자임을 알 수 있다.
인생도 만남도 유시유종(有始有終)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논어 자장(子張)편 “시작과 끝이 있는 사람은 성인뿐(有始有卒者, 其惟聖人)”에서 비롯된 말이다. 아마 ‘시작은 쉽게 해도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죽을 일도 없을 테지만, 태어났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이른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일이든 사람이든 만나지 않았다면 헤어질 일도 없을 테지만, 만났다면 반드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이른바 회자정리(會者定離)이다. 따지고 보면 시간도 공간도 모두 유시유종(有始有終)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잘 살아야 한다. 그냥 사는 게 아니다. 자~알 사는 거다. 잘 살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무얼 배워야 하는가. 스승이 ‘저 달을 봐라’하면 달을 쳐다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을 쳐다보면 뭘 배우고 뭘 얻겠는가.
칸트가 그랬던가. ‘철학(Phillosophie)을 배우지 말고 철학하는 것(Phillosophieren)을 배우라’고.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