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척(慘慽) 보다'와 '참척하다'의 차이

만언각비(11)

2020-05-26     이강록

떼려야 뗄 수 없는 정과 사랑으로 맺어진 게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다. 하지만 그 연줄이 죽음으로 끊어지는 경우는 얼마나 애달프고 참담한가. 흔히 폐부를 찌르고 애를 끊는다고는 하지만 그 심경을 무엇으로 이루 말할 수 있으랴.

슬픔 가운데서도 애절하고 참담한 경우를 일러 ‘애끊는 슬픔’이라고 한다. 여기서 애는 무엇인가. 애는 본디 창자를 가리키는 옛말이었다. ‘애간장을 다 녹인다’, ‘애간장을 저민다’의 ‘애’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디서 일성 호가(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의 바로 그 ‘애’이다. 하여 ‘애끊는 슬픔’은 있어도 ‘애끓는 슬픔’은 없다. 반면 걱정 때문에 ‘애끓어’도 ‘애끊는다’고는 않는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 천지가 어둡고 저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 자식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상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하늘이 너를 머물게 하지 않는가? 내가 죄를 지어서 그 화가 네 몸에까지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있은들 장차 무엇을 의지한단 말이냐?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너를 따라가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리라.” (충무공 ‘난중일기’)

충무공은 먼저 간 자식과 생사를 맞바꿀 수 없음을 한탄했다. 하늘을 원망하며 자식이 먼저 세상을 뜬 것을 이치가 잘못된 것이라고 통탄했다.

세상에 곧은 마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돌아온 것은 외로운 유배생활 뿐이었던 고산 윤선도. 삭탈관직도 그에겐 낯선 일이 아니었다. 가장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어린 나이에 급제한 영특한 둘째 아들의 죽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막내 아들의 죽음 소식을 접하게 된다. 두 아들을 잃은 슬픔은 그에겐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난정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리며 곧은 소리를 쏟아냈지만 그에게 돌아 온 것은 오랜 유배 생활과 두 아들을 잃은 절망감이었다.

두 아들을 잃은 고산은 “가을바람 불고 달 밝은 밤이면 내 어찌 누각에 오를 수 있겠느냐”며 창작의 원천이던 음풍농월(吟風弄月)을 끊었다.

자식을 먼저 잃는 일을 참척(慘慽)이라 한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 참혹한 슬픔을 가늠할 수 있으랴만 그런 아픔을 겪은 부모들의 심경은 한결같다.

소설가 박완서는 남편 잃은 지 석 달 만에 예비의사 외아들을 떠나보냈다. ‘청동기처럼 단단하고 앞날이 촉망되던 젊은 의사아들’을 잃고 신에게 “한 말씀만 해보라”며 ‘참척의 일기’에서 따진다.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게 저주스러웠던 그는 수녀원에서 20여 일 동안 ‘하느님과 대결하며’ 살았다고 했다.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를 생각하니 징그러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한 것이다. 6·25 때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아버지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류달영 ‘슬픔에 관하여’)

조선 후기 문인 이하곤은 여섯살 난 딸을 마마로 잃고 “물가에 가도 네가 떠오르고, 솔바람 소리를 들어도 네가 떠오르고, 달밤에 작은 배를 보아도 네가 떠오르니…이 아픔 어디에 끝이 있을까”라며 울부짖었다.

또 정약용은 갓 세 돌 지난 아들 농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귀양지에서 듣고 구구절절 애끊는 아비의 마음을 묘지명으로 남겼다.

참척이 뭔가. ‘슬플 참’에 ‘슬플 척’이다. 아들 딸 손자 손녀의 죽음을 보는 것이 참척을 당하는 일이다. 그 참담하고 혹독한 슬픔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그래서 예부터 가슴을 저며 내듯 아프고 구슬픈, 자식의 죽음을 ‘애물’이라고 했다. 선인들은 특히 아들의 죽음을 상명(喪明)이라고 했다. 빛을 잃고 희망이 사라진 처지를 말함이다. 마치 눈앞의 광명이 송두리째 사라져 칠흑처럼 캄캄해진 상태를 일컬음이리라. 하여 상명을 당한 사람에게는 “상명지통(喪明之痛)을 뭐라고 위로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조문해왔다. 손자 손녀나 딸의 죽음과는 달리 자신의 대를 이어야할 아들의 죽음을 그렇게 본 것이지만 요즘 같은 남녀평등시대 풍조와는 동떨어진 표현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들의 심정이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신앙인들마저 자기 믿음의 대상조차 부정하고 싶을 만큼 저주스럽고 원통한 심경이 아니었을까.

서양 사람이라 해서 다를 게 없다. 록 가수 에릭 클랩튼은 네 살 난 늦둥이 아들을 사고로 잃고는 술과 마약에 탐닉했다. 환각의 힘이라도 빌려 아들을 만나 보고자 했다. 그런 자학적 삶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지금도 간간히 들려지는 왕년의 히트곡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은 그런 사연을 담은 노래다.

엊그제 전주에서 불법 유턴 차량에 의해 두 살난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경은 오죽할까. 가해자는 더욱이 ‘민식이법’인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어린보호구역 치사 혐의다. 이날 사고가 난 지점은 스쿨존이다. 세월호 침몰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아픔은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다. 그 많은 부모들의 참척을 당한 아픔은 언제나 치유되려는지.

정녕 인생이란 인력으로 안 되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살아가며 기쁨을 쌓는 일보다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는 것 또한 크나큰 복이다.

주의할 것은 한자말인 참척(慘慽)과는 달리 ‘참척하다’는 전혀 다른 뜻이다. 즉 ‘한 가지 일에 정신을 골똘하게 쏟아 다른 생각이 없게 되다’는 뜻이다. 참척(慘慽)은 ‘참척을 보다’ ‘참척을 당하다’는 식으로 쓰인다.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