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심장 쏜 주역들에게 사육신을 허(許)하라
김명성의 '이슈 체크'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차 하얼빈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다. 안중근 의사는 권총 사살 방식으로 이토에게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를 물었다.
10.26일은 철권통치로 일관한 ‘유신의 심장’을 쏜 날이기도 하다. 박정희의 충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방아쇠를 당겼고 최소한의 희생에 그친 무혈혁명”이라고 말했다. 김재규의 죽음은 지금껏 조명되지 않고 있다. 유신의 종말을 알린 10.26은 전두환이 쿠데타로 가로채면서 거꾸로 새로운 독재의 서막을 열었다. 여태까지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이유다.
김재규, 세 차례 넘게 거사 실행을 꿈꾸었다
김재규의 10.26 거사를 권력 암투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려는 것은 그들 간의 다툼으로 깎아내리는 안일한 자세며 민주주의의 역사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김재규는 여러 차례 거사를 꿈꿨다. 거사를 꿈꾼 계기는 유신헌법 공포다(1972년 10월). 유신헌법이란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대통령이 틀어쥐고 종신집권하기 위한 악법이다. 일본 육사 출신답게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을 본떠 박정희 한 사람에게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다. 헌법도 정지시키고 연임제한도 없앴다.
김재규는 3군단장 시절 10월 유신을 접하고 박정희 방문 시 군단 안에 감금하기 위해 울타리를 개조했다. 2년 뒤 건설부 장관 발령 시 권총으로 죽이기로 하고 가족들에게 유서까지 남겼다. 장관 재직 때에도 권총을 숨기고 기회를 노렸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으면서 직선제와 긴급조치 해제를 건의했다. 박정희로부터 거절당한 것은 물론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0.26이 일어난 해에는 굵직한 사건이 연이어졌다. 야당인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 여직원의 강제 해산과 투신, 김영삼 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부산 마산에 시위가 확산된 부마민주항쟁, 불타는 경찰관서, 부산에 내려진 비상계엄령, 공수부대 투입,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의 발포명령 결심 발언’(항소이유서), 악화되는 대미관계... 그런 숨 가쁜 시국 속에서 10월 26일 밤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권총이 발사됐다.
위기관리 부재가 부른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
김재규의 10.26 거사를 미국의 사주로 보는 음모론도 있다. 이는 거사 후 드러난 위기관리 부재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현실성 없는 주장이다. 박정희 사망 직후 김재규는 육군본부로 갔다. 중앙정보부는 군대로 치면 중대병력 정도의 요원들뿐이다. 그곳에서 비상 국무회의도 열렸다. 김재규의 비상계엄 선포 주장은 국무위원들의 반대로 관철되지 않았다. 정승화 총장도, 김재규도, 국무위원들도 위기관리에 대처하지 못했다. 그렇게 허송시간을 보내는 동안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군부를 장악해 들어갔다. 즉각 김재규를 체포해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구타와 고문 속에 재산포기 헌납서까지 받아냈다.
전두환은 한 달여 지난 즈음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군권을 잡는 즉시 집권 플랜 짜기에 골몰했다.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가열차게 일어나는 와중에 전두환이 장악한 군부는 진압을 명분으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한편으로 김재규도 서둘러 처형했다. 그리고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전날 사육신 묘 벌초... “거사자 6명 사육신 묘 만들라”
김재규는 거사 전날 조상인 김문기 묘에서 직접 벌초하며 결행의 뜻을 다졌다. 단종 복위에 나섰다가 처형당한 공조판서 김문기는 당시 중신으로 사육신의 반열에 올랐다. 10.26 하루 전 조상 묘를 찾은 김재규는 5백여 년 전 단종복위에 나선 조상과 지금 민주주의 회복에 나설 후손인 자신의 운명을 떨리는 심정으로 비교해보았으리라.
김재규는 거사 직전에 부하들에게도 자신의 뜻을 밝혔다. 박선호 의전과장, 박흥주 수행비서에게 ‘민주주의를 위하여’ 거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해 여섯 명이 실행했다(경비원 이기주 김태원, 운전기사 유성옥 포함). 거사 후 연행된 부하들도 하나같이 거사 참여를 후회하지 않았다. 구타와 고문, 죽음을 앞둔 살벌한 법정 안에서도 여섯 명은 당당한 자세를 견지했고 죽음을 맞았다. 김재규의 마지막 유언도 의미심장하다.
“내가 죽고 나면, 좌우에 부하들을 묻어 사육신의 묘처럼 만들어라”
“내란 목적 아닌 민주주의 회복 위해 단독 실행“
김재규의 죄명은 내란 목적 살인죄, 내란 수괴 미수, 내란중요임무 종사 미수죄 등이다. 전두환이 이끈 합동수사본부가 내린 결론은 한마디로 내란 목적의 살인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40여 년 동안 숨죽이고 살아온 유족들은 내란 혐의를 씌워 진행된 재판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스스로 대통령이 되고자 대통령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최근 명예회복에 나선 유족과 변호인단은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단독으로 실행했던 것뿐이고,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폭동, 살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내란 목적의 대통령 살해라는 죄명은 당시 군부의 시나리오일 뿐이라는 것. 또한 군법회의에서 자행된 위법 수사와 재판, 비상계엄의 위법, 고문과 폭행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전두환의 광주학살 등 박정희 피살 이후 후유증으로 10.26의 평가에 인색하다. 그들 간의 총질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평가는 엄정해야 한다. 민주주의 회복을 안겨다 준 살상행위는 내란 목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민주주의 신장에 힘쓴 이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그런 평가는 서둘러야 한다. 민주주의 수호가 가장 취약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헌법재판소 탄핵기각 시 계엄령이 내려질 위기에 있었다. 불과 4년 전이다. 당시 기무사령관은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면 수 백 만의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행히 탄핵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에 계엄령이 취소됐다. 이는 역사적 평가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언제나 비극이 재연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김재규 재평가, 유신 처단 사육신 묘역 필요
10.26의 후유증은 정부의 위기관리 부재에서 비롯됐다. 박정희 한 사람에 집중된 국가권력이 공백 상태가 된 것이다. 힘 있는 군부가 권력을 탈취한 까닭이다. 그러나 후유증을 막을 수 있었다면, 김재규의 주장대로 10.26은 무혈혁명이 될 수 있었다.
10월 유신이 빚어낸 기형적인 대한민국은 초헌법적인 독재국가 그 자체였다. 박정희의 권좌는 종신집권이 보장되었다. 폭압적인 지배체제는 대중동원도 가능한 파시즘으로 변질되었다. 남북은 모두 병영(兵營)국가로 위기상황의 연속이었다.
김재규의 거사는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이 있기까지는 권력자 1인의 죽음으로 마무리됐다. 이제라도 내란 목적의, 권력 찬탈 목적의 살해가 아니라면 격에 맞는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 거사가 정당하다면 10.26 의거로, 의거의 주역인 그에게는 소원대로 ‘김재규 장군’으로, 6명의 거사자도 ‘유신 처단 사육신’으로 불러야 한다.
/김명성 논설위원(전 KBS전주총국 보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