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뿔로 듣는다
만언각비(10)
용은 대개 왕이나 왕권,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로 비유된다. 특히 용은 신통력을 가진 영물로서 사람들에게 신처럼 받들어졌다.
그런 까닭에 역대 황제들은 용의 위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용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조선 건국 시조들을 칭송한 서사시에 용비어천가란 제목을 붙인 이유도 다 여기서 비롯된다.
용은 항상 최고의 위엄과 권능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처럼 우러름을 받으며 위세를 자랑하는 용에게도 흠은 있다. 바로 용의 귀가 성치 않아 귀머거리이기 때문이다. 한방에서는 귀머거리를 용이(龍耳)라고 한다. 왜 그런지는 용의 속성을 알면 수긍이 간다. 용은 귀로 듣지 않고 뿔로 느낌을 알아채 듣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귀머거리 롱(聾)자는 용(龍)과 귀(耳)로 이뤄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위치에 다다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용이나 이무기쯤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크다. 어느 분야에서나 거의가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헌법상 최고 권한을 가진 사람은 더욱 그랬다. 마치 용의 권능과 위의를 갖췄다는 듯이 행세한다. 특히 한때 대통령직에 있던 사람 둘은 그 정도가 아주 심했다. 그래서 국민들의 얘기를 못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오만과 자세(藉勢)가 극에 달해 남의 얘기를 아예 듣지 않으려했기 때문인가.
흔히들 세상을 사는 데 약간은 귀머거리가 편하다고 한다. 골치 아픈 세상사에 오지랖이 넓어봤댔자 득 될 것이 없다는 뜻이겠다. 너무나 귀가 밝으면 골치 아플까 두려워 세롱(細聾)이 된 것도 아닐진대 어찌 이명박 전 대통령의 귀는 아예 절벽인지 알다가 모를 일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그의 잘못만은 아닐 수도 있다. 최고권력자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만 채워진 측근들과 참모들 탓일 수도 있다. 그 비위에 맞는 말로만 듣기 좋게 말하니 말이다. 그러니 이 전대통령은 얼마나 막무가내요, 만사형통(그의 형 말만 듣는다 해서 그 시절엔 ‘兄通’이라 썼다)이었겠는가.
귀를 막기로는 이명박 전대통령 못지않은 이가 박근혜 전대통령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날 당시 박씨의 의문의 7시간 행적만 밝혀도 세월호의 미스테리는 안개가 걷힌다. 국민 304명이 죽어가는 초재난 상황에도 ‘안방마님’ 박근혜씨는 나 몰라라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이러고도 국가원수라 할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는 기어이 4대강 사업을 벌였다. 겉으로는 희망선포식이란 번듯한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군사 퍼레이드식 자기과시에 지나지 않았다. 기공식서 이 전대통령은 4대강 사업이 ‘국민의 행복을 위한 미래사업’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국민 여론은 한사코 무시하면서도 자신이 밀어붙이는 사업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우국의 결정이라고 강변했다. 다른 모든 사람의 견해는 수준이 낮고 자신의 판단은 통찰력과 예지력이 있다는 투였다.
지금은 외신이 ‘눈길을 끄는 자본의 쓰레기들’이라 혹평하고 있다.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세계 10대 자본 쓰레기 중 세 번째로 4대강 사업을 꼽았다. 그러면서 ‘흰 코끼리(돈만 먹는 애물단지를 이르는 시사비평용어)라고 지칭했다. 이래도 4대강 사업이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우국의 결정이라고 억지를 쓸 텐가.
박근혜씨의 수준에 대해서는 아예 말문이 막힐 정도이니 여기서 그만 멈추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이 두 사람의 사례는 결론을 쉽게 끌어내게 만든다. 그래서 지도자가 용렬한데 고집스러우면 국민이 고생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다.
흔히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은 겸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뜻이 강하다. 그런데 이·박 전대통령은 듣지 못하니 겸허할 리 없고 자연히 독불장군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눈에 뵈는 게 없고 고집불통일 수밖에 없는 것은 뻔한 이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이 박정희 씨의 60·70년대도 아니고 민심을 그렇게 못 읽어서야 말이 안된다. 지금은 분명 인터넷만 접속해 봐도 민심을 간단히 읽을 수 있는 개명한 세상이다.
그런데 때마침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뚱딴지같은 소리로 국민들의 부화를 돋우고 있다. “두 분 대통령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사람들의 아픔을 놔둔 채 국민통합을 얘기할 수는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시대의 아픔을 보듬고 치유해 나가는 일에 성큼 나서주었으면 한다”고 사면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그것도 노무현전대통령 서거일을 앞두고였다. 두 전직 대통령은 뇌물과 국정농단이라는 범죄로 아직 사법처리 중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반성은커녕 사과도 여지껏 들어보지 못했다. 뇌물을 상습적으로 받아먹고 국정농단으로 탄핵을 당하고도 자신의 죄를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고 사과와 반성도 전혀 없었다.
때문에 ‘어떤 이유로 사면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이 더 타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본인의 잘못도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을 화합이라는 허울을 씌워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국민이 용납하지 않는다.
용은 왜 귀가 멀고 뿔이 돋쳤는가. 풍우조화를 불러일으키고 길흉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여의주를 지녔기 때문이다. 때문에 귀는 닫히고 뿔만 두드러지게 돋았다.
용은 만물의 조화능력을 갖춘 신비와 영험의 상징이다. 그 옛날 왕을 용에 비유하게 된 것이 용에게는 인간과 국가를 보호하고 물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통령을 왕에 비유하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발상이다 하지만 단순히 역할이나 위상 측면에서 가능하다면 지금의 이·박 전대통령은 용이 될 수 없는 그릇이었다. 아니 되지 말았어야 했다.
이 전대통령은 무엇보다 4대강이란 물을 살린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입증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흔한 예비타당성조사조차 하지도 않았고 환경영향평가도 졸속이라고 비난을 받았었다. 오히려 물로 인해 극심한 국론 분열과 민심혼란을 가중시켰을 따름이다. 그 22조원을 오늘의 코로나 재난지원금으로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이른바 ‘사자방(사대강, 자원외교, 방산 비리)’으로까지 확대하면 그 예산 규모는 천문학적이다. 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그래서 국민들은 지도자를 잘 뽑아야 된다.
오늘날 이런 수치스런 현실(자질 미달의 인물이 중책을 맡아 빚어진 혼란)은 모든 것이 다 용(두 사람은 용이 못되지만 용의 자리에 있었나는 전제하에)이 뿔로조차 듣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