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깊이 사무치게 사랑하라
만언각비
‘Adore yourself!’
첫머리부터 영어로 시작해 왠지 남우세스럽다. 허나 그 글귀가 전주 서신동의 한 미용실 들머리에 크게 붙어있는 슬로건임을 감안한다면 양해될 줄 안다. 미용실 입구에 대문짝만하게 이렇게 써놓은 의도가 대강은 짐작이 된다. 모두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 것인 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예사롭게는 안 보여 지나칠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래서인가. 미용실치고는 꽤 품격을 차리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고객들에게 은근한 자긍심까지 고무하는 듯했다. 점포 상호도 ‘아리비에Arivie〔(我利:내게 이로운)+ vie(생명·시간)〕’라나. 퍽 현학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점포, 어디서 그리 찾아보기 쉽지 않다. 점포 주인이 아마 네이밍 전공자나 되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문제의 글귀, ‘너 자신을 깊이 사무치게 사랑하라’ 쯤 될까. 또는 ‘너 자신을 흠모하라’는 뜻이 되려나. 스스로에게 흠모라는 말은 조금 어색하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되 그저 맹목이 아닌 ‘까닭이 있는’ 사랑을 하라는 뜻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자기애가 없는 이가 있겠는가. 누구나 제 몸 귀하게 여기며 자기 생(生)에 대해 애지중지하기 마련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랑 중에 가장 최고이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 ‘너 자신을 사랑하라(Love Myself)’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은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줄곧 궁리되고 제시돼 왔다. 아주 원시시대엔 먹는 것, 맹수와의 싸움, 날씨에 적응하기, 질병에 대응 등등으로 살아남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의식주 외에 문화 욕구, 자기실현 욕구, 삶의 질 향상 욕구 등 방법이 다양해졌다. 그러므로 그냥 간단하지가 않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도 다양해져 간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화욕구일 터.
오늘날 초등학생들에게 장래희망 직업을 물으면 유튜버, BJ, 스트리머 등 크리에이터를 비롯, 프로게이머 등이 인기 상위 순위에 오른다. 한때는 백댄서가 인기를 끌던 때도 있었다. 몇 년간 운동선수가 1위, 만화가, 가수, 조리사, 제과 제빵사 등도 상위권이다. 종래 단골 희망 직업이던 과학자 등은 선호도에서 한참 많이 떨어져 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만큼 직업의 귀천이란 관념이 사라져간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세상은 날로 삭막해져 가고 거칠고 흉포해져만 간다. 동양 서양 마찬가지다. 현대사회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인성이 메마른 데다 자기부정을 서슴지 않는다. 때문에 모르면 모르되 방탄소년단(BTS)의 노래인 ‘너 자신을 사랑하라(Love Myself)’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류의 화두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위 노랫말 속에 해답이 있다. 남을 사랑하려면 우선은 나를 사랑해야 할 것 아닌가.
“이제는 나 자신을 용서하자. 버리기엔 우리 인생은 길어. 미로 속에선 날 믿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은 오는 거야” 이 가사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 노래는 멜로디도 좋지만 가사가 정말 뜻깊다고 할 수 있다. 이 곡이 전하는 메시지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나 자신을 사랑하자’는 거다. 다른 어려운 얘기는 하나도 없다.
방탄소년단이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3년전 UN에서 한 연설에도 이 노래의 메시지를 담았다. 하지만 그게 꼭 아동과 청소년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으리라. 요즘 생활고, 소외감, 고독감, 질병으로 자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방탄소년단의 호소는 성인들에게도 적용돼야 마땅하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왜 자꾸만 감추려고만 해 네 가면속으로, 내 실수로 생긴 흉터까지 다 내 별자린데’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이 노래는 그 점을 비판하며 ‘나 자신을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방탄소년단의 외침처럼 자신을 사랑해야 일이 꾸며진다. 그 자신 사랑을 아동이나 청소년에 한정지을 일은 아니다. 성인들에게도 그 메시지를 전해줘야 한다. 물론 그 방법은 저마다 다르므로 제각기 찾아야 한다. 오로지 자기만의 것으로 최적화해야 된다.
그 방법을 누가 찾아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자신의 삶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을 것이므로. 단지 심리적 약자인 그들(자기를 버리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살피고 챙겨주는 일은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관심이기 때문이다.
남산의 검은 표범, 빛나는 시기를 위해 실력을 닦다.
표범은 민첩한데다 사납지만 온 몸의 검고 둥근 무늬로서 유명하다. 무늬가 가을에 더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남산에 사는 검은 표범(南山玄豹)은 더하다. 검은 무늬를 더욱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해 먹는 것도 잊고 햇빛을 피해 숨는다. 남산현표, 학문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는 학자들이 즐겨 사용한 말이기도 하다.
은일(隱逸)거사들이 본받으려 했던 이 말은 처음 정숙한 부인이 인용한 데서 나왔다. 중국 전한 시대 학자 유향(劉向)이 현명한 여인에서 악녀까지 이야기를 모아 귀감을 삼게 한 ‘열녀전(列女傳)’에서다. 현명전(賢明傳)에 실려 있는 도답자처(陶荅子妻)가 주인공이다.
도(陶)지역 대부 답자는 별로 한 일도 없이 3년 만에 재산이 세 배나 불어났다. 5년 만에 고향에 돌아올 때 어마어마한 행차로 모두 소를 잡고 환영했지만 그 부인은 아이를 안고 울었다. 시어머니가 화가 나서 연유를 물었다. 부인은 답한다.
‘남산의 검은 표범은 안개가 끼고 비 오는 날이 이레나 계속되어도 먹이 구하러 내려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좋은 무늬를 유지하고 몸을 숨겨 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것인데 하는 노력도 없이 부유한 것은 재앙의 시작일 뿐이라 지적한 것이다. 오늘날의 불로소득을 경계하는 부인의 처세였다. 노여움을 사 부인이 쫓겨난 지 1년도 안 돼 과연 답자는 도둑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부인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 시어머니를 잘 봉양했다.
은일 또는 은거는 오늘날 현실도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소극적 저항의 의미가 컸다. 그러니 반드시 도피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의 변형된 형태로 봐야한다. 부인의 표범 이야기는 표은(豹隱) 또는 남산무표(南山霧豹)라고도 하여 은거선비들에 더 잘 맞았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윤증(尹拯)의 시에도 나온다. ‘열심히 공부하려면 조용해야 하는 법(多少工夫靜裏宜), 남산의 안개 속 표범 보면 알 수 있네(南山霧豹可能知).’
사람의 능력이 단번에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는 없다.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서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우러름을 받는 자리에 오른다. 표범처럼 고충도 감내하지 않고 양지만 바라다가는 실패한다. 요즘의 낙하산 인사들은 그렇지 않지만. 남산표은(南山豹隱)이라는 이 고사를 끌어와, 매월당 김시습은 당대의 세상에서 벼슬을 사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뜻을 밝혔다.
김시습은 탈속한 삶을 살았으되, 적정주의(寂靜主義)에 빠지지 않았다. 그저 하릴없이 놀고먹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스스로 농사를 감독하면서 농민들의 삶에 공감하고, 배불리 먹는 무리들에 대한 증오로 치를 떨었다. 그는 장인(丈人), 하궤(荷簣)와 달랐다(둘 다 논어에 나오는 은둔자). 세상일을 과감하게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김시습은 너무 일찍 신동으로 알려졌고(오세신동), 성격도 거칠어서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웠다. 그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광기를 발하고 농담과 익살로 세속을 조롱했다. 사람들이 자기의 그런 몰골을 보고 손가락질하면 더 좋아했다. 그의 광기는 세상일에 분개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현실 공간을 벗어난 다른 곳에 절대 가치의 세계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김시습은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세상의 결함을 목도하고 애처로움을 느꼈다. 그만큼 광기를 수시로 발했다. 매월당의 광기는 자기애의 한 모습 아닐까.
“불구의 몸이지만 역사를 위해 남기리라”
사마천(司馬遷)은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역사가이다. 《사기(史記)》의 저자로서 동양 최고의 역사가로 꼽힌다.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사마천은 이릉(李陵)의 충절과 용감함을 찬양하고 두둔했기 때문에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宮刑)을 받게 됐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될 처지였다.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해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선인들도 불행을 극복해 위대한 업적을 남겼거늘, 나도 불구의 몸이지만 비통함을 참으며 채찍질해 무슨 일이든 남기리라.”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 때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했다. 그 후 무제의 신임을 회복해 환관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됐다.
남성을 포기하는 치욕을 감수한 사마천, 그런 차마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위대한 자신의 목표를 이룩했다. 그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역사의 집대성, 아니 거의 완성에 가까웠다. 어느 누구도 결심하기 힘든 선택을 자처하는 결단과 용기, 누구라서 감히 따르랴. 남성임을 포기하고 역사서를 완결하는 집념과 의지, 자신을 사랑하는 신념이 아니고서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요즘 많은 심리학자들과 정신의학자들이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대단히 유익하다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자신감을 갖게 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한다. 반대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부정적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감이 없고 큰일도 할 수 없다.
라틴어 명언에도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거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허투루 시간을 허비하는게 아닌가 싶다.
‘아마추어’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의 라틴어 ‘아마레’(ama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는 진정한 아마추어가 될 때 자신의 분야에서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되리라 믿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길은 아마추어가 되는 일이다. 아쉬움 없도록 온전히 자기 자신을 사랑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매우 드물다고 여긴다. 그래서인가. 정호승은 시 ‘가을’에서 이렇게 설파한다.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 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나를 사랑하기, 완성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조급해 할 것까지는 없되 노닥거리지는 말아야겠다.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