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센 조직은 늘 쿠데타를 꿈꾼다: 경찰, 군부, 검찰
김명성의 '이슈 체크'
수사기관의 범죄단서 찾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디지털 증거 덕이다. 방법은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s). 휴대폰이나 노트북에 남아있는 디지털 정보를 들여다보고 단서를 찾는 수사기법이 바로 그것이다. 범죄자들이 버티는 수단은 ‘조작 주장’이다. 하지만 그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되면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지금 검찰의 ‘고발 사주’ 또는 ‘청부 고발’ 사건이 그렇다.
검찰과 공수처가 김웅 국민의힘 의원과 공익제보자 조성은 씨의 통화녹음 파일을 복원하면서 모든 게 까발려졌다. 검찰이 선거를 앞두고 선거판을 뒤집으려한 검찰 쿠데타 의혹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은 권력기관의 쿠데타에서 시작된다. 경찰과 군부, 그리고 최근의 검찰이 그렇다.
부일협력자 조직 키운 이승만, 경찰 쿠데타 불러
해방이 되면서 살길 찾기에 혈안이 된 친일파는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미군정이 이들을 모두 요직에 등용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치안을 담당한 군정경찰은 친일경찰이었다. 한걸음 더 이들은 좌익 세력 척결이라는 미군정 정책에 호응하면서 명분을 얻어갔다. 애국자로 변신해간 것이다. 미군정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이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에 관한 특별법률조례’를 제정하자(1947년 7월 2일) 인준을 보류하고 법의 공포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법안 중 경찰규제 조항을 수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종로경찰서장 김형진은 반대주장과 함께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의 파워는 어느 권력기관도 대적할 수 없었다. 미군정 기간 친일파 처리문제는 중단되고 말았다.
1948년 정부수립 직후 일제 부일세력을 청산해야한다는 여론 속에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특위법)을 가결했다(9월 7일). 반민특위가 구성되고 노덕술, 김태석 등 친일경찰들이 속속 체포됐다. 지식인과 재벌도 체포됐다. 극우단체들은 반공구국 총궐기대회를 열어 반민특위 활동을 규탄했다.
경찰도 서울시경 소속 9,000 명이 집단사표를 내며 정부를 압박했다. 이승만도 이들을 적극 옹호했다. 이승만은 해방 후 치안에 힘쓴 공로를 들어 친일 경찰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친일파로 꾸려진 이승만 정권의 예고된 행보였다.
반민족행위자 처벌 나선 국회 엎은 경찰쿠데타
이승만 정권의 경찰은 ‘반공 경찰’로서 정보와 보안기능이 중시됐다. 그만큼 권한이 막강했다. 경찰은 조직의 강점을 활용해 집단적으로 저항했다. 경찰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까지 짰다. 특위위원들과 국회의원들의 친일경력도 터뜨리며 혼선을 빚게 했다. 일부 경찰은 군대로 도피성 자원입대했다. 국회의 보수우익 세력은 서둘러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정권 유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적이나 반대파 제거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국회의원들이 붙잡혀 갔다. 경찰들은 대낮에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해 요원들을 유치장에 불법 감금하고 고문했다. 서류와 투서함, 무기까지 탈취해갔다. 전국 각시도 사무실을 봉쇄했고 연락 전화선도 모두 절단했다.
당시 국회의원 노일환은 국회에서 경찰의 특위습격 사건을 ‘경찰쿠데타’라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반민족세력의 민족세력에 대한 공격이자 국회를 향한 정부의 공격이었다. 이승만의 제1공화국 체제가 파쇼 독재임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는 김구 암살로 이어지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김진혁·이헌종·김삼웅·김동춘)
장장 31년 군사통치의 시발점 5·16 군부 쿠데타
4월 민주혁명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지 8 개월 만에 잠재워졌다.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장교 250명이 사병 3,500 명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반란군은 새벽 세 시쯤 약간의 총격전을 벌였고 5시 첫 방송을 통해 이른바 ‘공약’을 발표했다. 9시에는 반란군이 꾸린 위원회 명의의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오후 7시에는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고 밝혔다. 이틀 후인 18일 도피해 있던 장면 총리는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내각 총사퇴와 정권 이양을 의결했고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회의 결정을 그대로 재가했다. 일단 성공한 쿠데타였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4년 전 소장으로 진급했다. 장면 정부는 사단장으로 떠돈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다카키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로 두 번이나 창씨개명한 친일 전력 때문이 아니었다. 좌익 전력이었다. 박정희는 세 차례나 쿠데타를 감행하려했다. 혼란을 틈탄 반란 시기만을 기다렸다. 쿠데타 모의는 1960년 9월부터 시작됐다. 쿠데타 기도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군부가 힘센 자들이었기에 누구도 일망타진에 나서지 않았다. 반란 소식을 접한 윤보선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고 체념하고 반란군에 사실상 승복했다.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도 쿠데타 강제진압에 나서려다 접었다.
박정희 쿠데타에서 권력 맛 본 전두환도 쿠데타
청년 장교 전두환은 당시 서울대 학군단 교관이었다. 전두환은 군사반란 다음날 박정희를 무작정 찾아가 독대했다. 그 다음 행보가 발 빨랐다. 전두환은 쿠데타 세력의 실세인 양 육사교장을 찾아가 생도들이 지지시위에 나서도록 압박했다. 반란 이틀 뒤 육사생도와 장교, 졸업생 1,000여 명이 서울 시가를 행진했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비서관으로 발탁했다. 전두환은 육사출신 사조직을 만들어 국군 수뇌부를 장악해 들어갔다. 바로 ‘하나회’다.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죽었을 때 군사반란과 대학살이 거침없이 진행된 힘이 이미 축적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피살되자(1979년 10월 26일) 사건 직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살해범으로 체포했다. 김재규는 ‘국민 여러분 나는 민주회복을 하고 갑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처형당했다(5월 24일).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2월 12일 오후 6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도록 지시했다.
긴급히 보고할 일이 있다고 방문한 전두환 졸개들은 참모총장의 얼굴에 총을 들이대며 강제로 끌고 갔다. 총장 부관이 전화기를 집어든 순간 총을 난사해 죽였다. 5.16에 이어 제2의 군사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전두환 중심의 정치군인들은 모두 하나회 출신이다.
계엄 상황에서 권총으로 군권을 장악한 정치군인들은 방송사, 신문사, 통신사를 즉시 통제아래 두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의 대통령 취임(1979년 12월 21일)은 과도정부일 뿐이었다. 박정희의 잔여 임기는 1984년이었으나 최규하는 이듬해인 1980년 8월 16일 돌연 사임했다. 열 하루만인 8월 27일 전두환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광주의 피를 딛고 제5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김삼웅·유시민·오성현·이만섭).
세계 최고 수준의 권력 거머쥔 한국 검찰 쿠데타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한국 검찰의 권력이 막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검찰은 형사 절차의 주재자이자 지배자이다. 즉 형사사법 절차의 모든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수사기관 및 공소기관으로서 수사의 시작, 수사방법의 선택, 구속영장의 신청, 기소 선택, 공판진행, 재판의 집행까지 법률상 권한을 휘두른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수사의 독점과 재판의 지배는 실체적 진실규명 작업을 독점하는 것을 뜻한다. 법원은 검사가 기소한 것에 한정해서 소극적으로만 진실을 규명하는데 그친다. 실체적 진실규명 권한을 독점했다는 것은 진실의 독점으로 나타난다. 법률상의 권한은 더 나아가 도덕적인 권위까지 갖게 된다(김인회).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막강한 힘과 권위까지 갖는다면 지나치게 비정상이다. 위험한 생각을 가진 자에게 힘과 권위가 주어진다면 검찰 독재로 직행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과 그 휘하 특수부 출신 검사들의 ‘검찰 발(發) 하나회’의 등장이 바로 그 사례다.
대통령도 여러 명 잡아 넣은 검찰은 자신들 앞에 선 초라한 권력자를 보았다. 대통령의 죽음까지도 영웅담으로 삼는 그들은 어느 날 자신들의 세계를 꿈꾸었을 법도 하다. 400 명에 불과한 군 장성들도 세 번이나 대권을 잡았다. 군부의 실세는 하나회였고 육사 11기 주축에 한 기수 서 너 명씩 가입시킨 흔들림 없는 조직이다.
이에 비하면 2,000여 명의 검사 조직은 막강하다. 엘리트 권력 집단으로 손색이 없다. 그 중 특수수사를 담당하며 끈끈한 연대의식을 가진 수 십 명의 끈끈한 특수부 출신 검사들은 얼마나 든든한가. 정치권에서 '검찰 하나회'로 부르는 이유다. 검찰은 검찰 개혁에 줄기차게 저항했다. 국가 기강을 뒤흔든 청부 고발 사건이 터져도 검찰 내부적으로 논란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검찰 쿠데타 두둔하면 야당 침몰도 불 보듯
검찰이 선거판을 뒤엎으려 한 청부고발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디지털 증거가 말해주고 있다. 검찰의 정치 개입 자체가 쿠데타다. 정치검찰은 경찰이나 군부처럼 무력 사용이 불가능하니 정치권과 손을 잡았다. 자신들이 만든 청부 고발장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검찰의 권한을 활용해 수사의 칼을 휘둘렀다. 검찰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의 목을 골랐다.
공적인 권력을 자신들 집안의 사적 이익 지키기에도 동원했다. 대통령 공약인 원전에도 손을 댔다. 하나회 보다 더 한 연대의식으로 명예로운 검찰 권한을 그렇게 휘갈겼다. 검찰이 거침없이 쿠데타 짓을 남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재판까지 좌우해왔던 차고 넘치는 힘이다. 가재가 게 편이듯 어차피 판사도 검찰 편이다. ‘검찰 직수(직접 수사)사건’은 판사도 검사 의도대로 따라줘야만 훗날 편한 노후가 보장된다.
검찰 쿠데타를 완전히 진압한 후에 사법부 개혁이 뒤따라야할 이유다. 내년 3월 정권 획득을 꿈꾸는 야당도 쿠데타 세력의 처단에 힘을 모아야 한다. 사법개혁도 논해야 한다. 국민은 쿠데타를 원치 않는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향해 개혁을더 원한다. 국민의 뜻을 외면한 채 검찰 쿠데타를 두둔하다가 다시 야당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김명성 논설위원(전 KBS전주방송총국 보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