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32)
‘야구계의 신사’ 김준환 ①
황금사자기, 호남선 열차에 싣고 군산으로 향하던 날
1970년대 국내 고교야구. 사람들은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했다.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라고도 하였다. 동아일보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주최한 황금사자기 쟁탈 제26회 전국지구별초청 고교야구쟁패전 결승 9회 말에서 군산상고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전국고교야구 패자로 군림하는 데 성공한 그날 이후부터다.
역전이 역전을 낳고, 파란이 파란을 불러일으켰던 제26회 황금사자기 결승 진출팀은 영남의 강호 부산고와 창단 4년의 신출내기 군산상고였다. 조명탑의 칵테일 라이트가 휘황하게 비추는 1972년 7월 19일 오후 7시 서울운동장 야구장.
군산상고는 1회말 김봉연의 2루타로 선취점을 뽑았으나 3회초 1점, 8회초 3점을 내줘 1-4,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9회말 공격에서 6번 타자 김우근의 안타와 핀치히터 고병석, 9번 송상복의 연속 포볼로 1사 만루,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한다.
다음 타자는 1번 김일권. 그가 몸에 맞는 포볼로 나가면서 2-4로 따라붙는다. 계속되는 1사 만루 찬스에서 2번 타자 양기탁이 천금 같은 안타를 때려 4-4 동점을 만든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3번 타자 김준환의 극적인 끝내기 좌전 안타로 5-4 역전승. 흙과 땀으로 범벅된 선수들은 붉은 자주색 바탕에 포효하는 사자를 수놓은 금빛 찬란한 황금사자기와 순은제 대형 우승컵(4kg)을 호남선 열차에 싣고 군산으로 향한다.
당시 군산상고 진용은 최관수(감독), 송경섭(부장), 선수= 김준환(주장·2루수), 김일권(유격수), 양기탁(중견수), 김봉연(1루수), 양종수(포수), 김우근(좌익수), 조양연(우익수), 정효영(3루수), 고병석(PH), 송상복(투수) 등. 이 대회에서 양종수는 최우수선수상, 송상복은 우수선수상, 양기탁은 수훈선수상, 최관수 감독은 지도상을 받는다.
군산상고의 선제 득점, 타이, 역전, 재역전 무려 네 차례나 엎치락뒤치락. 이날 경기는 한국 야구 100년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최고의 명승부로 남아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야구 애호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총알 같은 굿바이 안타로 2시간 40분에 걸친 대장정에 종지부를 찍고, 고교야구 역사를 바꿔놓은 김준환(군산상고 야구부 3기) 선수. 2003년부터 원광대 야구부 사령탑을 맡고 있는 그의 소감을 들어본다.
“그때 제가 핀치에 몰렸었죠.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인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투수 손목을 주시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공이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때는 어느 선수가 나갔어도 안타를 쳐냈을 겁니다. 최관수 감독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 하셨고, 선수들은 꼭 이겨야 한다는 각오와 의지로 똘똘 뭉쳐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승리도 극적이었지만, 분에 넘치는 환영과 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군산상고의 영광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다. 창단 초기에는 아침을 거르고 연습에 임하는 선수도 있었고, 모래를 구입할 돈이 없어 연탄재로 야구장을 고르면서 의기투합했다. 김준환 감독은 “비가 내리면 운동장이 질퍽거렸는데, 선수들과 학생들이 연탄재를 두 장씩 들고 등교할 정도로 열의에 차있었다”면서 “4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이야기지만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열정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아래는 그날의 두 도시 현장 분위기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
복(伏)더위 씻은 백열의 결전···
3도(都)는 흥분 속에 묻혀 승자도 패자도 울었다
군상, 황금사자기 쟁취하던 날
시민들 춤추며 ‘만세’- 군산
통분···TV마다 ‘만원’- 부산
황금사자기를 놓고 군산상고와 부산고가 서울운동장에서 마지막 대결을 벌인 19일 밤, 군산과 부산 두 항도는 벅찬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통분에 엇갈려 한여름의 무더위도 잊었다. 이날 저녁 7시부터 군산 시민들은 일손을 놓고 모두 라디오와 TV 앞에 몰려들어 거리는 말 그대로 완전철시. 시내 중심가 TV 상회와 다방 등은 TV 관중으로 꽉 들어찼다. 밤 9시 반경 황금사자기가 군산으로 돌아가는 순간 시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고 얼싸안고 춤을 추며 승리의 환희에 열광했다.
군산-호남야구 신기원의 축제
해망동 해망양로원의 정정호(60) 노인 등 40여 명은 야구경기를 제대로 모르면서도 “군산상고가 이겼다”는 소식만 듣고 거리로 몰려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으며 군산상고 교무실에서 TV를 지켜보던 학생 200여 명은 승리가 결정된 순간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만세와 교가를 불렀다.
이날 중앙로 평화동 등 도심지 술집에는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밤늦도록 흥분에 들떠 축제 분위기를 이루었고, 20일 새벽 2시 30분 서울에 응원 갔던 시민 학생 150여 명이 전세버스 3대를 타고 시청 앞에 도착하자 잠자던 시민들까지 나와 이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부산-TV에 찻잔 던진 팬도
시내 중심가인 중앙동과 광복동 일대 다방은 TV 중계를 보려는 손님으로 초만원을 이뤘으며 길가 공용주차장에 세워둔 자가용차의 카라디오로 중계를 들으려는 군중이 차 주변에 웅성댔고, 중앙동 H살롱에서 술 마시던 시민 6명은 야구결승 중계가 진행되고 있다는 호스티스 이야기를 듣고 술자리를 박차고 이웃 텔레비전이 있는 다방으로 몰려가버리기까지 했다. 시민들은 부산고교가 4-1로 우세해있던 8회 초까지는 계속 환호성을 지르며 섭씨 32도의 무더위를 잊었으나 종반에 부산팀이 불리해지자 울분을 터뜨렸고, 9회 말 4-5로 역전되는 순간 광복동 B다방의 한 시민은 텔레비전을 향해 찻잔을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이것이 야구(野球)의 묘미(妙味)···꿈꾸는 듯하다”
“참 멋있는 게임이다.”,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한여름밤 성동 원두를 대낮같이 밝힌 나이터의 휘황한 불빛 아래 야구팬들은 스탠드 떠나기를 아쉬워했다. 선제(先制), 타이, 역전, 또 역전, 무려 네 차례나 엎치락뒤치락. 젊음만이 발휘할 수 있는 투지와 끈기의 접전이었고, 스포츠만이 향유할 수 있는 열광의 대향연이었다.
아직은 쨍쨍한 태양열이 그라운드를 쪼이고 있을 오후 5시쯤 3루 측 스탠드에는 미리미리 자리 잡기 위해 팬들이 모여들었고, 경기가 시작되는 7시 정각 약 2만 5,000명의 팬들이 자리 잡은 가운데 라이트 쪽 외야석엔 군산상고 150여 재학생과 원정 온 시민응원단 60명이, 레프트 쪽 외야석엔 부산고 재경 동창응원단이 들어차 열띤 응원전으로 플레이볼. 부산에서는 장거리 전화가 본부석으로 잇따라 부산 시민의 관심을 드러냈고, 군산상고는 ‘스마일 피처 잘한다’는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1회말 선제점을 뺏긴 부산고는 3루 측 나이터가 켜지기 시작한 3회초 안타 공세로 타이(1-1)를 만들자 황금사자기 쟁탈은 또 한 번 파란을 예고하듯 승리의 여신은 좀처럼 어느 쪽에도 미소를 던지지 않았다.
실로 7년만에 정상에 도전하는 부산고와 호남야구 중흥의 사명을 짊어지고 우승의 문턱에서 분투하는 군산상고 팬들은 두 패로 나눠져 여름밤 무더위를 압도하는 열기를 품었으나 8회 부산고의 대량득점으로 승세는 부산고 쪽으로 기우뚱.
그러나 승리 일보 전 부산고의 편기철 투수가 갑자기 난조를 보이자 스탠드에서는 절규에 가까운 “봉수야”(부산고 선수), “기철아”가 연발. 아슬아슬한 순간을 대변했고, ‘극적인, 너무나도 극적인’ 역전 우승이 호남선 열차에 탔을 땐 승자도 패자도 모두 울어버렸다.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순간 군산상고 응원단은 일제히 그라운드에 쇄도, 땀과 먼지와 눈물에 얼룩진 군산상고 나인을 등에 업고 열광 또 열광- 역시 게임은 승자의 것이었다. 넓은 야구장은 군산상고 일색으로 변하고 격전의 핵지대인 피처마운드에는 승리팀 감독, 교장, 주장 등이 차례로 7월의 밤하늘에 전신을 높이 떠올려지는 즐겁고 벅찬 순간순간이 엮어지기도 했다. 야구협회 임원들도 이 경기를 두고 야구의 ‘정수’를 본듯해 후련하다며 아직 이같이 ‘멋있는 경기’를 본 일이 없다고 한마디씩. (1972년 7월 20일 자 <동아일보>)
군산상고가 결승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키고 우승까지 거머쥔 그 날. VIP룸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계단을 통해 1층으로 올라가던 이용일 당시 경성고무(주) 사장은 황금사자기 대회를 주최한 동아일보 김상만 사장을 만난다. 그의 소회를 들어본다.
“고향은 버릴 수 없는 거더구만, 돌아가신 김성수(동아일보 창업주) 아들(김상만)이 동아일보 사장이었단 말이야. 그분이 대회장이었지. 황금사자기를 동아일보에서 주최했으니까. 그때 나는 경기 끝나고 1층으로 올라가고 그는 2층에서 내려오다가 나를 만났단 말이야. 그때 그가 내 손목을 꽉 잡으면서 ‘이사장 고마워!’라고 하는 거야. 자기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고향에서 우승했다 이거지. 눈물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눈물이 글썽한 것처럼 보이더라고..”
이용일은 “그때 한국의 고등학교 야구는 인기가 최상이었지만 서울, 부산, 대구 지역 학교들의 축제였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고등학교 야구는 들러리였단 말이야. 그러니 김상만 사장이 감격할 만도 하지. 그의 고향이 전북 고창이었으니까.”라고 부연했다.
‘역전의 명수’는 시민의 저항정신과 끈기의 결집체
지난 6·4지방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문동신 군산시장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제26회 황금사자기 결승 9회 말 역전 우승의 쾌거를 이루던 1972년 7월 19일 밤 서울운동장에서 경기고등학교 영어 교사인 동창과 함께 목이 터져라 응원했었다.”라며 그날의 감격을 되살렸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저는 군복무시절 부대 야구단 투수로 활약했던 경험이 있어 야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969년 2월 대위로 예편하고 농어촌진흥공사에 입사하여 계장으로 재직할 때 황금사자기 결승전이 열린다고 해서 경기고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강송식 동창과 서울운동장에 응원하러 갔죠.
군산상고가 9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극적으로 우승하는 순간 두 사람은 기쁜 나머지 더그아웃에서 뛰어내렸어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군산 시민의 조직문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는데요, ‘역전의 명수’는 우연히 얻어진 게 아니라 전설처럼 내려오는 시민의 저항정신과 인내, 포기하지 않는 끈기 등의 결집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문 시장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항거했던 백제 오성인의 애국충절과 호남 지방에서 최초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3·5만세운동), 옥구농민항일항쟁(1927년) 등의 항거 정신이 결집하여 끈기와 투혼의 역전의 명수를 낳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계속)
※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책 및 나이는 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