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거시기한 시국에 엄청 거시기한 기분

만언각비

2021-09-29     이강록 기자

「칸트와 오리너구리」,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다. 이 책을 보면 우리가 어떤 말을 할 때 의도하고자 하는 것과 그 의도가 잘 전달되는 것 사이에는 언어라고 하는 기호가 관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코가 예를 든 것 중에 스머프에 관한 관찰이 나온다. 스머프는 그들이 말하는 모든 명사, 형용사, 부사, 동사를 ‘스머프’로 바꾸어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말을 스머프들은 “스머프가 스머프다”라고 말한다는 거다. 이럴 경우 말한 사람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느냐는 오직 스머프라는 단어 하나의 뜻에 의존한다. 즉, 앞의 스머프는 사람이고 뒤의 스머프는 희망이다. 결국 스머프들의 사전에는 단 한개의 단어만 들어 있다. 그것은 오직 스머프라는 단어이고, 그 설명에는 스머프라는 설명 뿐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우리들 실제 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도로 위에서 자동차 경적을 생각해보자. 자동차 경적 소리는 일정한 톤으로 연속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오직 경적 소리의 길이로서만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특정한 자동차 경적 소리의 시간적 길이에 대해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지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적이 없다. 1초 동안 울리는 경적과 2초 동안 울리는 경적에 대해 의미의 차이가 있는가? 하지만 운전자들은 상황에 따라 적당히 경적소리를 내고 경적소리를 듣고 행동한다. 눈치껏 알아서 뒤에서 나는 소리가 나더러 빨리 가라는 것인지 비키라는 것인지 헤아린다.

“거식아! 그때 거시기를 거시기해서 거시기하지 않았냐.”

물론 이것은 경적 소리뿐 아니라 신호등, 주변 상황, 수신호, 말소리 등으로 추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상황파악을 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적 소리만으로 뜻을 표현하고 전달하면서 소통한다. 때문에 한 개의 단어로만 표현되는 언어가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당연히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소통한다.

스머프처럼 하나의 단어로 모든 대화를 통용한다면 아마도 모르스 부호처럼 될 것 같다. 모르스 부호는 그래도 2개의 표시가 있으니까 스머프 언어보다는 조금 더 낫지 않나 싶다. 우리말에도 그와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다. 사투리로 알고 있으나 표준어인 ‘거시기’다.

“거식아! 네가 그때 거시기를 거시기해서 거시기하지 않았냐.”

아니 이름마저도 거시기라 부른다. 그래도 뜻은 통하고 소통은 이뤄진다. 참 신통하기도 하다. 정말 거시기한 표현이자 소통법이다. 이미 고인이 됐지만 에코가 이 사례를 알게 되면 뭐라고 말할까? 기호학 언어학의 거장인 그분이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오리너구리가 알을 낳는 젖먹이 동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시점에, 칸트는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칸트가 오리너구리를 만났다면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까? 환경에 완벽히 최적화돼 디자인된, 파충류와 조류를 닮았으나 포유류인, 이 기이한 존재. 오리너구리를 통해, 움베르토 에코는 칸트의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재까지의 철학을 찬찬히 응시하다가도 뒤집고는 다시 촘촘히 들여다본다.

당시 괴생물체인 오리너구리를 칸트는 만나지 못했다. 만약 만났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만남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벌어지는 정체성 혼란에 대해 누가 쉽게 예측하겠는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오리너구리와 그 존재성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양서류마냥 물 안에서도 물 밖에서도 살 수 있으며, 오리같은 주둥이에 두더지같은 몸, 그리고 비버의 꼬리를 달고 있으며, 알을 낳지만 젖을 먹이는 그런 생물. 오리너구리는 조물주의 질서를 일탈한 해괴망측한 괴물이 아니다.

경직된 인식론의 허점을 꾸짖기 위해 조물주가 보낸 경이로우면서도 유연한 존재 아닌가. 오리너구리가 생명의 진화사에서 어느 동물보다도 일찍이 출현한 것으로 보아, 오리너구리가 다른 동물들의 신체부위로 합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동물들이 오리너구리의 오묘한 게슈탈트를 하나씩 떼어간 것 아니겠는가.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무슨 사이

마르코 폴로가 코뿔소를 전설 속의 일각수로 본 것도, 아스테카 원주민이 스페인 정복자들의 말을 거대한 사슴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까닭이 있다. 에코는 그 연유를 ‘범주적 질서’라고 캐고 있다. 즉 사람들이 한 묶음으로 이해하려는 인식 방법이다. 그처럼 범주적 질서의 강요 속에서는 낙타는 네 발 달린 타조로, 오리너구리는 창조주의 보편질서를 파괴한 해괴망측한 왜상(歪像)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에코의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의 철학적 지식만 있다면, 제목에 들어 있는 오리너구리라는 존재가 칸트의 인식과 범주 이해를 교란하는 대상임을 쉬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요즘식으로 말해 우리는 에코에게 낚시질 당한 거다. 하지만 이렇게 당하는 네다바이는 유쾌하다. 왜냐고? 어려운 질문에 진절머리를 치는 독자들을 위해 즐겁게 관심갖게 하려는 에코의 의도적인 장치였으므로.

어쨌든 서문은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당혹스럽지만 한껏 궁금증을 유발한다. 칸트가 오리너구리라는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에코 특유의 유머 감각에 매우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당황함은 이내 사라진다.

우리는 곧바로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칸트와 오리너구리」라는 기이한 책 제목의 정당성을 이해하게 된다. 칸트가 오리너구리를 알았다면, 그의 철학은 어떻게 수정되었을까? 너무 나갔나. 공연한 상상일테니 그만 깔끔히 매조지자.

아르헨티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천국을 도서관의 형태로 상상할만큼 열렬한 책 애호가였다. 또 경이로울 정도로 박학다식한 작가였다. 그래서 그가 어깨 위에 머리 대신 큰 도서관 하나를 얹고 사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어도 무방하다.

「장미의 이름」으로 널리 유명한 소설가이자 철학자이며 뛰어난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도 보르헤스 못지 않게 박학과 다식을 자랑한다. 무려 9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한다니 말 다했다. 거기에 약 40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본인이 재직하던 볼로냐 대학교 도서관의 모든 책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기억력의 달인이다. 한번 읽은 책은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걸 보면 책과 관련해서는 굉장한 기억 능력을 갖고 있었던 인걸이었다.

그런 에코도 보르헤스에게서 받은 영향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 영향에 대한 불안을 꽤나 의식했다. 누구의 ‘아류’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적잖이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기호학 책 「칸트와 오리너구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책 제목에 하필 인식론적 문제의 상징으로 ‘오리너구리’를 택한 이유가 나온다.

그는 “보르헤스가 모든 것에 대해서 말했지만 단지 오리너구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고, 그래서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즐겁게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에코가 이 책 원고를 인쇄업자에게 넘기려는 순간 누군가가 비록 글은 아니지만 어떤 대담에서 보르헤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알려주고 만다. 아뿔싸! 김샜다.

“캥거루와 오리너구리 말고도 다른 동물들의 부분들로 합성된 끔찍한 동물로는 바로 낙타가 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에코의 기분은 어땠을까. 보르헤스가 말하지(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고, 자신은 결코 보르헤스의 영향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실망감 같은 걸 느끼지 않았을까.

가짜가 진짜같은 세상 눈 똑바로 떠야

에코의 소설들은 모두 가짜와 진짜가 뒤엉켜 있다. 그래서 가짜가 더 진짜로 다가온다. 가짜는 진짜같이 다가와 혼란스럽다. 때문에 미로같은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런 함정과 장치를 통해 무엇이 진짜인가를 가려내는 능력을 기르라는 뜻이겠다.

하기야 요즘 세상은 온통 슈도(pseudo)가 판치는 세상이다. 가짜뉴스, 가짜 정품(正品), 짝퉁, 페이크, 피싱… 그래도 사이비는 차라리 낫다. 진짜는 아니되 진짜를 흉내 내려고는 하지 않든가. 그런데 요즘 가짜는 아예 대놓고 진짜보다 낫다고 설친다.

그러니 푸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고 에코선생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논문 잘 쓰는 방법」 「지구를 위한 세 가지 이야기」 이런 글만 쓰지 말고 좀 더 친절하고 자상하게 ‘세상의 거짓에 속지 않는 법’이라도 좀 써놓으시지 그랬나요.

물론 여러편의 소설 외에도 칼럼과 에세이를 통해 세상의 거짓에 속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려 힘쓰셨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가짜에 무뎌지고 익숙해져서 정작 중요한 선택인 나라의 명운을 책임질 대표자를 뽑는 선택마저 그르칠까 적잖이 걱정이 돼 그렇습니다.

‘주 120시간 화끈하게 일하고’, ‘부정식품’, ‘남여 교제를 막는 페미니즘’, ‘후쿠시마 원전’, ‘메이저 언론사’ ‘집 없어 청약통장도 없다’, ‘임금 차이 없으면 정규직 비정규직 큰 의미 없다’, ‘손발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 이런 실언 시리즈를 내놓은 후보지원자도 있다.

단지 실언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그의 정치철학과 현실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표현이기에 그렇다. 이런 인식과 가치관으로 대통령을 꿈꾸다니 자질도 모자란데다 준비도 안 돼 있는, 꿈속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슈도 아닌가.

적어도 이런 가짜에게 속는 사람은 없으리라. 지나친 우려는 건강에 해롭다. 그러니 노파심을 거둔다. 혹시 하는 마음에 덧붙인다. 오리너구리는 오리가 아니다. 너구리도 아니다. 그냥 오리너구리일 뿐이다. 오리로 속아서도 안되고 너구리로 속아서도 안된다. 있는 그대로 오리너구리로 보아야 한다. 슈도와 짝퉁에 속지 말자.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지치고 힘들어 한다. 영세 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들은 이미 빈사 상태다. 그 뿐인가. 침체된 경기마저 위축되고 서로 파급돼 모두가 죽을 지경이다. 이런 암담하고 침통한 시절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도나캐나 나서서 모두 제가 잘났다고 천방지축으로 나댄다. 참 거시기한 시국인데 기분도 엄청 거시기하다.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