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가을 강물에다...
신정일의 '길 위에서'
가버린 사람들과 한 잔 술이라도 나눠야겠다. 잠이 깊지 않은 내가 유독 여러 번 깨고 깨고 하다가 잠은 멀리 달아나고, 이책 저책 뒤적이다 책상 앞에 앉는다. 출근과 퇴근이 명확하지 않은 직업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나간 시절이 떠오르는 명절 바로 전날이기 때문에 가버린 사람들이 내 마음속으로 성큼성큼 찾아오기 때문이다.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슬픈 표정으로 아랫사람에게 분부를 내렸다. “대나무 숲 속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깨끗이 쓸어 자리를 마련하고 술 한 동이와 고기, 생선, 고일, 포를 갖추어 성대한 술자리를 차리도록 하라.”
연암은 평복 차림으로 그곳으로 가서 술잔을 가득 따라 올리신 후 한참을 앉아 계시다가 서글픈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상위에 차렸던 음식을 거두어 아전과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아들 박종채가 그 연유를 묻자 연암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저번에 꿈을 꾸었는데 한양성 서쪽의 친구들 몇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자네 산수 좋은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왜 술자리를 벌여 우리를 대접하지 않는 것인가?’ 라고 하였는데 꿈에서 깨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두 죽은 사람들이었다. 마음이 서글퍼서 상을 차려 술을 한잔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법에 없는 일이고 다만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다. 어디다 할말은 아니다."
이 얼마나 가슴이 훈훈해지고 또 쓸쓸함이 물밀 듯 몰아오는 이야기인가?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과연 ‘텔레파시’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 되기도 하고 그것을 순응하듯 받아들이고 술 한 잔 올리며 서글퍼하는 연암의 마음, 아, 세월은 그 누구라도 다 돌아가게 하는데... 창밖은 고요하고, 칠흑처럼 어둡고, 시간은 흐른다. 그래, 그 누구든 오면 간다.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그대는 찬 빗속으로 사라져버린” 것도 아니면서...
내가 누구를 편들고 내가 누구를 증오하고,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내가 누구를 서러워하겠는가. 이 신새벽, 문득 연암의 글을 읽으며 가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으로 흐르는 시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을 뿐, 시간이 나고, 차편이 있다면 섬진강으로 나아가 부치지 못할 편지 한 장을 써야겠다. 흐린 가을 강물에다.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