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29)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의 야구인생⑤
회사 경영권 상실에도 야구 사랑 변하지 않아
“선경그룹(회장 崔種賢)이 신발메이커인 주식회사 경성고무(대표 李容一)에 50대50의 자본금 증자형태로 경영에 참여했다. 13일 관련 업계에 의하면 선경그룹은 그동안 수출을 대행해온 경성고무와 자본 증자 형태로 경영에 참여한다는 원칙에 합의, 선경합섬 울산 공장장 김봉환(金奉煥) 씨를 경성고무 전무로 임명했다.(아래 줄임)”-1976년 11월 13일 치 <매일경제>
신문은 “이같은 결정이 있게 되기까지 경성고무는 1970년과 1974년 두 차례에 걸친 큰 불과 7억여 원에 상당하는 수출 선수금 때문에 고전해왔으며 선경그룹에의 계열화 작업은 3개월 전부터 시작, 지난 주일에 주식회사 선경 경영진이 군산 공장을 둘러본 후인 10일 확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라고 덧붙인다.
그해(1976년) 11월 13일은 경성고무(주) 창립 44주년 기념일이었다. 이용일 사장은 군산에 내려와 종업원들과 기념식을 조촐하게 치른다. 회사 생일임에도 직원들은 침울했다. 고무신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경영 악화로 주식 50%를 선경(현 SK)에 넘겨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용일 사장은 경영권도 선경에 넘겨주고 직함만 갖게 됐음에도 야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1978년 봄. 그는 대한야구협회 김종락 회장과 최인철 부회장의 부탁을 받는다. 네덜란드 5개국 친선대회(8월 13일~21일)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제25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8월 25일~9월 6일)에 초청받은 한국 대표팀 단장을 맡아달라는 것.
제의를 수락한 이용일은 네덜란드에서 만난 쿠바야구협회 ‘나폴레온’ 회장에게 쿠바 야구는 출생지에서만 할 수 있고, 초등학교 선수가 되면 취업까지 그 지역에서 보장한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 야구도 새로운 바람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네덜란드 대회에서 강팀 쿠바를 꺾고 2위를 차지했지. 대표선수들과 함께 한 달가량 지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한국 선수들이 일찍 유니폼을 벗는 게 제일 아쉽더군. 그해(1978) 상업은행이 백호기 대회에서 우승했지. 김준환이 주장이었는데, 나에게 오더니 금일봉 3만 원 받았다며 야구 그만둬야겠다는 거야. 어이가 없더군. 70년대 중반까지도 우승하면 선수들 승급도 시켜주고, 보너스로 뭉칫돈을 쥐어줬는데 말이야. 한국 야구가 망하겠더라구. 그때 충격으로 프로야구 구상에 더욱 매달렸지.”
김종락 회장은 이용일을 다시 찾는다. 김 회장은 1977년 12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국제아마추어야구 연맹총회에서 어렵게 유치한 ‘82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려면 실업연맹, 대학연맹, 고교연맹으로 나뉜 별도기구를 통합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후 이용일은 장태영(실업), 김진영(대학), 풍규명(고교) 등을 만나 설득에 나선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 연말에 세 단체가 해산 총회를 열고, 1979년 1월 지금의 대한야구협회(KBA)가 출범한다.
그 후 이용일은 야구계에 발길을 끊는다. 그러나 김 회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대한야구협회 전무(1979~1980)를 맡는다. 그가 전무 시절 구상한 사업은 야구인 외국 연수, 알루미늄 배트 초·중·고교에 무상공급 등. 특히 통합기념 이벤트로 대학과 실업 선수들이 각자 졸업한 모교 유니폼을 입고 겨루는 ‘고교야구대제전’을 제안, 그해 10월 하순 즈음 개최한다. 김 회장은 우려했으나 첫 경기부터 만원이었다. 재경 동창회와 동향인들이 경기장을 찾아 응원전을 펼치며 향수를 달랬다.
‘한국 프로야구 창립 계획서’ 빛을 보다
1979년은 제2차 석유파동, YH무역여공 농성사건, 부마민주항쟁, 박정희 대통령 피격사건(10·26 사건) 등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그해 12·12군사반란과 이듬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사정 바람이 휘몰아쳤던 1981년 어느 봄날. 집에서 쉬고 있던 이용일은 서울대학교 동기 이호헌의 전화를 받는다. 프로야구 창설을 계획하고 있는데 도와달라는 것. 이용일은 밤을 새워가며 작성한 18쪽 분량의 ‘한국프로야구 창립계획서’를 보내준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 이번엔 이상주 청와대 교무수석비서관 전화가 걸려온다.
이 교무수석은 이용일에게 난색을 표한다. 지역감정을 심화시킬 수 있으니 계획안을 수정해달라는 것. 이용일은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이유는 프로야구는 GNP 2만불 이상 되는 나라에서 여가 선용을 위해 하는 스포츠인데 2천 불도 안 되는 나라에서 특색도 없이 프로야구를 어떻게 하냐는 거였다.
이용일은 난동을 부려도 운동장에서 그치는 남미 실태를 조사해보고 내 구상안(한국 프로야구 창립 계획서)이 맞는다고 생각되면 실력자들(허화평·허삼수·이학봉)을 납득시키라고 전한다. 그리고 열흘 후 청화대로부터 예정대로 추진하라는 연락을 받는다.
“나도 처음에는 선수들 중심으로 알아봤지. 그런데 동대문상고 나온 윤동균 고향이 강원도라 하고, 선린상고 나온 박노준 출생지는 목포라 그러고···. 그걸 다 어떻게 뽑아. 하루 종일 하다가 집어치우고, 고등학교 졸업 중심으로 바꿨지. 경상도 아이라도 전라남북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무조건 ‘해태’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내가 전두환 정권의 노리개로, ‘3S 정책’(영화·섹스·스포츠)에 놀아났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야. 1978년부터 구상해온 ‘한국프로야구 창립계획서’(성장기·발전기·안정기 각 3년씩 9개년 계획안)를 당시 청와대에서 100% 밀어줬고, 지원해준 것이지. 처음에는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지만, 결국 내 계획안대로 진행됐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한국프로야구 젊어져야 해. 우리 야구 수준이 높아졌거든. 요즘 최고 연봉이 15억인가 하는 모양인데, 25억, 30억 받는 선수가 나와야 한다 이거야. 관중도 더 늘어나야 해. 애정과 열정으로 매니지먼트 할 수 있는 리더가 나와야 프로야구가 살아. 썩어빠진 정신으로 하면 안 돼.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야, 됐어. 그만하자고.”
국내 프로야구 창립 주역으로, 초대 KBO 사무총장을 10년 넘게 맡아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 초석을 다진 이용일 총재 대행은 인터뷰 내내 왕성한 모습을 보여줬다. 팔순을 넘겼음에도 놀라운 총기(聰氣)와 40대 못잖은 열정이 넘쳐났다. 깊게 패인 주름에서 카리스마도 느껴졌다. 그는 기자의 명함을 챙겨 지갑에 넣고는 총총히 자리를 떴다. (계속)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책 및 나이는 2013~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