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시계
백승종의 '역사칼럼'
권력자들은 자기네끼리 모여앉아 국가 현안을 토의하고 결정한다. 나는 평범한 시민이라, 한 번도 그런 모임에 낀 적이 없었다. 권력자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이야기가 쌓여 있다.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중종 때의 깨알 같은 기록이다. 개혁정치가 조광조 등이 참석한 경연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어전에서 경전의 심오한 뜻을 캤고, 이것을 당대의 현실 문제와 결부시켰다.
잘은 몰라도 지금의 권력자들도 중요한 회의석상에서는 국내외 석학들의 이론을 인용하며 적절한 해결 방안을 강구하려 하지 않을까. 조광조가 정력적으로 개혁을 추구하던 중종 13년(1518) 9월 15일의 일이었다. 그날 경연 석상에서는 『대학(大學)』이란 경전이 화제였다. 길고 긴 그들의 토론을 나는 편의상 3회전으로 쪼개보았다.
1회전과 2회전은 순수한 학문적 논의였는데, 처음에는 주로 ‘인(仁)’을 논의했고, 나중에는 ‘경(敬)’의 의미를 따졌다. 3회전에 이르러 토론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미쳤다. 혈통이 끊기고 만 노산군(단종)의 계보를 이어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여기서 길게 말할 겨를은 없으나, 조광조의 개혁사상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있었다.
첫째, ‘언로의 개방’을 중시했다. 조정의 정치에 관해 선비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광조 등은 국가권력이 소수의 특권층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상을 없애려 하였다.
둘째, 향약(鄕約)과 <소학>을 중시했다. 아직 관직에 등용되지 못한 선비들도 유교적 도덕을 바탕으로 통치에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선비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고향에서 지역공동체의 운영에 적극 참여할 길을 활짝 열었다.
셋째, 과거제도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천거제를 도입하였다. 과거제도를 시행한지가 오래 되자 선비들이 시험 자체에만 몰입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연구하지 않게 되었다. (사법시험을 시행한지 오래되자 다들 법조문만 들여다 볼 뿐 법의 근본 정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거시험을 통해 선발된 관리들이었으나,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조광조는 국왕을 겨우 설득해, 이른바 “현량과”라는 추천체 시험을 도입했다. 조광조 등은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해, 조선사회를 유교적 이상국가로 바꾸기를 원했다.
이것이 쉽게 성사될 일은 물론 아니었다. 앞서 말한 그 날의 경연에 참가한 이는 중종을 비롯해 총 13명이었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해, 좌의정 신용개(申用漑)와 우의정 안당(安瑭)도 참석했다. 의정부 좌참찬 조원기(趙元紀)와 예조판서 이계맹(李繼孟),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형조판서 이유청(李惟淸)도 있었다.
조정 원로대신들이 모두 참석한 것이었다. 개혁파의 수뇌부도 다 나왔다.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를 정점으로, 대사헌 김정(金淨), 도승지 문근(文瑾), 승지 권벌(權橃)과 김정국(金正國)이 참석했다. 경연에서 누가 발언을 많이 했는가를 살펴보면, 그날의 경연을 주도한 세력이 저절로 드러난다.
학문적 토론을 좌우한 이는 다름 아니라 조광조와 그의 동료 김정이었다. 시사문제를 적극 거론한 이도 그들의 동료 권벌과 김정국이었다. 대신들 중에는 소극적으로나마 토론에 참가한 이도 없지 않았으나, 대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1회전에서는 3정승이 차례로 돌아가며, 『대학』의 핵심인 ‘인’과 ‘경’의 정의를 요구했다. 조광조 등 개혁파 소장관리들이 답변에 나섰는데, 좌중의 주목을 끈 이는 김정이었다. 그는 ‘경’의 가치를 강조하여, “경(敬)에는 인(仁), 경(敬), 효(孝), 자(慈), 신(信) 다섯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2회전은 김정이 말한 ‘경’의 개념과 기능에 대한 토론이었다. 조광조와 김정의 질의응답이 몇 차례 길게 이어졌다. 원로대신 이유청, 신용개, 조원기 등도 논의에 가세했는데, 조광조의 무거운 한 마디로 토론이 막을 내렸다.
“임금은 천하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라. 임금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온 천하에 공경하지 않는 이가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 3회전이 시작되었다. 승지 권벌은 조광조의 견해에 찬동하며, 중종의 마음가짐에 잘못된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중종의 마음이 “공정하지 못해서”, 노산군의 제사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노산군의 후사를 정해 제사를 주관하게 해야 그것이 ‘인’의 실천이요, ‘경’의 도리라고 했다.
개혁파의 최고이론가 김정이 권벌을 엄호했다. 먼 옛날 중국의 고전시대에는 망한 왕조라도 제사를 잇게 하는 법도가 있었다고 했다. 그것이 임금의 ‘공정’한 도리라는 것이었다. 김정국도 거들었다. 그는 송나라 사마광의 학설을 빌려, 중종의 우유부단함을 비판했다.
과거 왕자의 난(1398년)에 희생된 방번과 방석도 훗날 세종이 광평대군 이여(李璵)와 춘성군 이당(李讜)을 통해 후사를 이은 전례가 있다는 점을, 김정국은 강조했다. 요컨대 조광조 일파는 노산군의 뒤를 이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로대신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대신의 일부는 유보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중종도 반대의견에 합류했다.
“선왕께서 하지 않은 일이다. 내가 태도를 바꾸어 노산군의 후사를 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중종과 원로대신들의 주장에는 명분도 이론적 근거도 없었다. 그들은 조광조 일파의 제안을 거부할 만한 실질적인 이유도 대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신중론의 뒤에 숨어서, 개혁파의 주장을 꺾었다.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무슨 일만 있으면 항상 "사태를 엄중히 주시하고" 있노라며 할 일없이 월급만 받은 어떤 정객이 생각난다.)
후세의 역사가들 중에는 정광필 등 그 당시의 원로대신을 일컬어, 조광조의 일파라고 주장하 이가 매우 많으나, 재고할 점이 있다. 그날의 경연 풍경은 조광조 등 개혁세력의 비극적 운명을 예고하기에 충분하였다. 젊은 개혁가들은 고전에서 배운 명분과 의리를 바탕으로 현실을 뜯어고치려 했다.
그랬기에 임금의 면전에서 감히 임금의 약점을 고발했다. 허나 기득권층과 사실상 한 몸이었던 원로대신들은 신중론을 펼치며 개혁의 동력을 끊기에만 바빴다. (매사가 이렇게 '신중론'을 빌미로 개혁의 동력을 끊는 쪽으로만 흘러 갔다. 근자에 제기된 검찰 개혁 문제도 아마 정부와 여당의 수뇌부는 비슷한 방식으로, 시간만 흘려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1519년(중종 14) 겨울, 중종과 그의 대신들은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파를 좌절시켰다. 이른바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와 김식을 비롯한 개혁파의 핵심세력을 모두 죽였다. 나머지 선비들은 모두 귀양을 보내거나 관직에서 쫓아냈다.
개혁파가 중시했던 향약, <소학> 등을 다시는 감히 누구도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추천제 과거시험 인 ‘현량과’도 무효로 돌려, 그 시험에 합격한 인사들은 관리로 임용될 자격을 잃었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갔다.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서 우리의 '역사의 시계'도 얼마든지 거꾸로 돌아갈 수 있다!) 조광조의 제자와 손제자들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6세기 후반에야 겨우 조정에 복귀하였다.
출처: 백승종, <<선비와 함께 춤을>>, 사우, 2018.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