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을 배웠단 놈이 제 몸 아프니 별 수 없구만!

강병철의 '의학 에세이'

2021-09-06     강병철 객원기자

뇌가 뜻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24시간 안개가 낀 듯해도 그럭저럭 책을 읽고, 음악은 들을 수 있었다. 글을 쓰기는 어려워도 번역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태가 점점 심해지더니 급기야 아무 일도 하기 싫고, 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항상 피곤하고, 머리가 무거우며, 속도 메슥거렸다.

제일 괴로운 건 책을 옮길 때 적절한 번역어가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데 끝내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하면 한 문장에서 서너 군데가 그랬다. 짙은 안개 속에서 언뜻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언가를 하루종일 쫒는 기분이었다. 진이 빠졌다. 주변에 하소연하면 "이 사람아, 나는 10년 전부터 그랬어!"라고 하는 데는 기가 막혔다.

그런 상태로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온라인 강연을 했다. 많은 분이 기대를 걸고 있는 행사라 취소할 수는 없었다. 다리를 허리 위로 들어올려야 한발짝 떼어 놓을 수 있는 진창을 걷는 기분으로, 하지만 큰 실수 없이 강연을 마쳤다. 후기를 올리고 싶었지만, 글을 쓸 수 없었다.

십수 년 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선배를 자주 떠올렸다. 그러다 치매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증상이 비슷한 것 같아 겁이 더럭 났다. 신변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며칠을 자못 비감하게 보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거 뭐야? 명색이 의학을 배웠단 놈이 제 몸 아프니 별 수 없구만!'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는 살 수 없었다. 뭔가 해야 했다. 말초신경염 때문에 먹는 항우울제를 끊기로 했다. 금단증상이 심해 두 번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책을 참고해서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완전히 끊고 일주일쯤 지나 아침에 일어났는데 햇살이 찬란했다.

'찬란'이라고? 흐린 날은 당연히 우울하고, 맑은 날은 햇살에 눈이 부셔 짜증이 났는데 '찬란'이라니! 그러고 보니 머리가 무겁지 않았다. 한달 내내 못하고 미뤄뒀던 일을 하루에 다 해치웠다. 출간일정이 잔뜩 밀려 있는 줄 그때야 깨달았다. 다음날은 아내와 꽤 힘든 하이킹을 하고, 술도 한잔 했다. 정말 오랫만에 맥주 맛을 제대로 느껴보았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다음 날, 말초신경통이 돌아왔다. 그제는 아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대비한 대로 새로운 약을 써보았다. 통증은 가라앉았는데, 역시 신경에 작용하는 약이라 오늘은 머리가 조금 무겁고 몸이 나른하다. 이 약을 끊어야 한다면 여러 가지 대안적인 방법들을 시도해봐야 할 것이다.

평생 환자들과 주변에 "힘 내세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좋은 쪽을 보세요."라고 얘기하며 살았다. 이제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그 말을 해야 할 차례다. 그나마 의학을 배운 덕에 상황을 이해하고, 정보를 찾아보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피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늘이 큰 일을 맡기려고 할 때는 반드시 큰 고난을 주어 단련시키는 법이라 하지 않던가. 75세가 되면 롤링스톤스 같은 밴드를 만들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아듣는다. 

/글·사진=강병철(소아과 전문의·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