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증오는 공허한 삶에 큰 힘이 될 수 있을까?
강준만 교수의 명언 에세이④
“증오는 사랑처럼 맹목적이다”
“분노는 고통을 동반하지만 증오는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322 B.C.)의 말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분노는 공격받았을 때 일어나지만 적개심은 그렇지 않고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사람의 성격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사람을 증오할 수 있다. 분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그라질 수 있지만 증오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최근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증오의 물결도 그런 게 아닐까요? 우리 인간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230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게 흥미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네요.
“증오는 사랑처럼 맹목적이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작가인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1608~1661)의 말입니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André Gide, 1869~1951)는 “근거 있는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 근거 없는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더 낫다.”고 했습니다만, 이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네요. 풀러가 지적했듯이, 사랑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 증오에도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악순환이 벌어지지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모르기 때문에 증오한다. 그리곤 우리는 그들을 증오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영국 작가 찰스 칼렙 콜튼(Charles Caleb Colton, 1780-1832)의 말입니다. 사이버공간에서 증오의 악플을 퍼붓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요?
“사람은 증오나 경멸을 지배할 힘이 없다.”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말입니다. 그는 증오는 감정에 가장 예민한 심장, 경멸은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두뇌와 관련돼 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심장은 불변의 것으로 심장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떤 원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고, 두되는 변하지 않는 법칙과 객관적인 자료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것이므로 자아에서 관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워낙 섬뜩한 진단인지라 별로 믿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배설되는 증오와 경멸, 그게 유명인사의 것이면 어김없이 언론의 뉴스로 다뤄지곤 합니다. 언론에게도 증오나 경멸을 지배할 힘이 없는 걸까요? 아니면 클릭수 올라가는 재미에 그 힘을 포기하거나 역이용하기로 한 걸까요?
“경멸스러운 상대를 증오하기는 어렵다”
“증오는 가치의 소멸로 향하는 감정이다.”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 1883-1955)의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명언을 남긴 이들이 많습니다. 미국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Archibald MacLeish, 1892~1982)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는 것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은 병든 사람이다.”고 했고,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증오하면 그 증오가 점점 커져 곧 전 인류를 증오하게 된다.”고 했지요.
증오를 비판하는 이런 명언들은 다 아름다운 말이지만, 증오가 사라지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증오를 지배할 힘이 있건 없건, 현실 세계의 갈등에서 ‘증오의 힘’이 매우 크며 그로 인한 현실적 이익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특히 증오는 전쟁의 주요 동력이지요. 프랑스의 군사학교 에콜 드 게르의 교수인 콜랭(Colin) 소령은 “다른 어떤 때보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 증오만큼 군대를 고무하는 힘이 큰 것은 없다”며 “프랑스인이 독일인에게 증오를 품지 않았다면, 1870년의 전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이 말을 인용한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Gustave Le Bon, 1841-1931)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러일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지요.
“일본인들이 자신들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만든 러시아인들에게 품었던 무시무시한 증오도 일본인들이 승리를 한 원인에 포함될 것이다. 일본인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던 러시아 군인들은 일본인들에 대한 적의가 전혀 없었다. 이것이 러시아가 패한 원인 중 하나였다.”
미국 사회운동가이자 작가인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도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1951)이라는 책에서 비슷한 말을 했지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쁘기만 한 적보다는 장점이 많은 적을 증오하는 편이 쉽다. 경멸스러운 상대를 증오하기는 어렵다. 일본이 우리 미국보다 유리했던 점은, 우리가 그들을 부러워한 것보다는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증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우리를 증오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평소 가까웠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부 투쟁이 그렇지 않은 투쟁에 비해 더 잔인한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적에 대한 맹목적 증오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력한 원동력을 만들어낸다....증오가 없는 사람은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중남미의 게릴라 혁명투사 체 게바라 (Che Guevara, 1928-1967)의 말입니다. 그는 증오를 적에겐 공포를 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을 통제하고 지휘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 이해했지요.
“증오는 공허한 삶에 의미와 목적을 줄 수 있다”
증오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힘이 되기도 합니다. “증오란 신성한 것이다.”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해 한 말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독일 간첩누명을 쓰고 투옥된 것에 대해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나는 고발한다!>는 언론 기고문을 통해 열정적으로 그의 무죄를 주장하고 나서 프랑스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사건입니다.
졸라는 싸움을 시작하면서 “자부심과 증오를 나의 두 친구로” 만들었다고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이 시대의 진부함에 반항할 때마다 내가 더 젊어지고 더 용감해진 것처럼 느낀다....지금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홀로 서 있고 또 미워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이게 가장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에밀 졸라의 증오는 아름답지만, 그건 예외에 가깝습니다. 전혀 숭고하지 않은 이유만으로 ‘묻지마 증오’의 전사(戰士)가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설령 정의를 표방한 증오일망정 그들에게 그런 명분은 부차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구분하는 건 쉽지 않으니 이래저래 증오는 번창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증오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요? “열정적인 증오는 공허한 삶에 의미와 목적을 줄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에릭 호퍼의 말입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어떤 숭고한 대의에 헌신할 뿐만 아니라 열광적인 불평불만을 키워나간다. 대중운동은 그들에게 이 둘을 다 충족하는 무한한 기회다.”
호퍼는 “증오는 모든 단결의 동인 중에서 가장 흔하고 포괄적인 요소”라고 말합니다. “증오는 우리를 휘어잡아 자신의 본 모습을 잃고 행복과 미래를 잊게 만들며 자아를 추구하는 의지와 질투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우리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과 결합하여 하나의 불길로 끓어오르려는 갈망에 전율하는 익명의 분자가 된다. 하이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하지 못하는 것을 공동의 증오가 해낸다고 말한다.”
혹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친하지 않은 사람일망정 누군가를 같이 증오할 때 느끼는 묘한 연대감 말입니다. 호퍼는 그런 연대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의 증오는 아무리 이질적인 구성원들이라도 하나로 결합시킨다. 공동의 증오심을 품게 되면 원수된 자라 해도 어떤 동질감에 감화되며, 그럼으로써 저항할 힘이 빠져나간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이용한 것은 동족 독일인들을 단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유대인을 증오하는 폴란드와 루마니아, 헝가리의 결연한 저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프랑스에서도 이를 꾀했다. 히틀러는 반공주의도 이와 비슷하게 이용했다.”
“나는 당신들의 증오를 환영한다”
증오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독일 시인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질투와 증오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말합니다. “증오는 적극적인 불만이오. 질투는 소극적인 불만이다. 질투가 그렇게 금세 증오로 바뀌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증오엔 반드시 치러야 할 비용이 있는 법이지요. 미국 신학자 호제아 벌루(Hosea Ballou, 1771~1852)가 말했듯이, “증오는 자기 형벌이다(Hatred is self-punishment).” 우리 인간이 그런 자기형벌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형벌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증오를 매개로 싸우다 보면 종국엔 싸우면서 증오의 대상을 닮아가지요. 이게 가장 소름끼치는 일 아닐까요? 에릭 호퍼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거의 예외없이 자신들이 증오하는 억압자를 닮아가는지 보면 경악스러울 정도다.”고 했는데, 이건 제3자의 시선일 뿐 정작 증오의 망령에 사로잡힌 당사자는 그걸 모르지요.
어쩌면 증오의 대상을 닮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도 있었던 걸 재발견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는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그 내부에 있는 자신의 일부분을 증오하는 것이다.”고 했는데, 그런 일련의 심리적 과정을 ’투사(projection)'라고 하지요.
증오를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독일 작가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는 [혐오사회: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2016)에서 “증오에 대처하려면 자신과 똑같아지라는 증오의 유혹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증오로써 증오에 맞서는 사람은 이미 자기도 따라 변하도록 허용한 셈이며, 증오하는 자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진 것이다. 증오에는 증오하는 자에게 부족한 것, 그러니까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응해야 한다.”
증오의 대상이 된 사람은 어찌해야 할까요? “그들은 나를 증오하는 데에는 모두 한통속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한다.”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의 말입니다. 증오의 대상이 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나 루스벨트의 그런 여유 또는 허세를 흉내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증오에 굴복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증오로 인해 고통받고 상처를 입는다면, 그거야말로 그 증오자가 가장 원하는 일이 아닐까요?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사람을 즐겁게 해줘야 한단 말입니까? 루스벨트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외칠 수는 없을망정 마음 속으로나마 이렇게 외쳐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는 당신들의 증오를 환영한다.”
/깅준만(전북대 신방과 교수)/사람과 언론> 제8호(2020년 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