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배우고 싶어한 그녀
[에세이] 문득 머무는 기억
여러 해 전, 외국에서 우리 한국의 농촌으로 와준 어린 신부들을 만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기초생활수급자 중 취업을 희망하시는 분들을 돕는 일을 했다. 외국에서 온 그녀들을 만나러 가면서는 좀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가령, 한자어 가득한 행정문서를 쉬운 한글로 다시 고쳐쓰고 여러 부 프린트해가야 했고 여러 사람과의 실랑이를 각오해야 했다. 어린 신부의 경우 본인의 취업 의사도 중요했지만 한국의 가족, 그러니까 남편이나 시댁의 찬성 없이는 취업까지는 고사하고 바깥출입이 힘든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달라졌길 바란다.
팀장님과 차로 푸르른 논밭을 달리다보면 드문드문 집이 보였고, 비닐하우스도 보였고, 큰 모자와 토시에 싸인 그녀들이 시어머님이나 남편과 함께 농약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손가는 일이 끝도 없는 농촌. 그 바쁜 몸짓 앞에서 ‘응위엔(가명)씨! 계시죠?’를 외치다가 뙤약볕에 그을린 작고 어린 얼굴을 마주하면, 내 창백한 피부만큼 민망한 분위기가 되곤 했다.
크레파스를 찾다가 서류 뒷면에 립스틱으로 그림을...
채 스무살도 되지 않던 그녀들, 어린 엄마들. 한 사람을 기억한다. '부모님 뫼를 모셔야한다’는 서른 몇살 연상의 남편을 둔 여성이었다. 자그만한 집 곁에 한 쌍의 봉분이 있었고, 나와 팀장님은 그 집을 오갈 때마다 두분의 묘를 향해 절을 하는 것으로 예우를 갖췄다. 그녀도 취업을 원했지만 남편분의 반대가 심했다. 먹고 살 만큼 충분히 경작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남편분이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담뱃재를 털 때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날은 벌써 세 번째 면담이자 마지막 방문일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다른 취업희망자들도 있으니까. 팀장님께서 피우지도 못하던 담배를 나누며 남편분과 최후의 설득작업에 들어간 사이, 나는 그녀와 서너살 아이들 둘과 함께 있었다. 갈색 구슬 같던 여섯 개의 눈동자는, 내가 한국의 어린이들이 한다면서 배꼽인사를 보여주고 연신 억지 웃음을 노력하자 정감있는 표정을 띠었다.
크레파스를 찾다가 서류 뒷면에 립스틱으로 그림을 그려주자 셋이 까르르 웃었다. 사자에 이어 곰도 고양이도 펭귄도 그리는데 아이들은 그림을,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본다. 바깥 세상에 대한 열망이었을까. 평평한 지평선이 녹색으로 가득하던 곳, 차로 한참을 달려야 찢어진 종이조각같은 인가가 드문드문 스치던 곳. 평균연령이 육십몇세인 곳.
그녀의 남편은 우리가 처음 찾아갔을 때, 경계하며 ‘지(신부) 살던 곳보다 잘 먹고 사니까 냅두라'고 소리쳤었다. 그 음성이 떠오르며 나는 그녀의 응시가 아팠다. 정장을 입은 내 차림새가, 마스카라와 분으로 덮인 피부가 따가웠다.
"컨, 퓨터, 배,우고, 싶어요”...귓전에 생생
팀장님의 한숨소리가 깔리며 이제 가자고 일어나는데, 그녀의 눈길이 내 손으로 옮겨갔다. 금색테를 두른 립스틱. 친구에게 선물받았던 립스틱은 오년이 넘은 것이었다. 손짓과 글씨로 설명하면서 크레용으로만 쓰라고 둘째 아이에게 쥐어주었는데 나올 때 벌써 그녀의 입술 위에 진홍색으로 발려 있다.
그녀가 불쌍하다거나 걱정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각자의 짐을 진다. 그때 나도 내 매듭을 통과하고 있었다. 배우자의 암이 악화되어 주말에 서울을 오갈 때마다 눈물바다였다. 투병기간이 길어지면서 가족들 모두 예민해졌고 나는 '조용히, 작게 만들어야 한다'는 모종의 의무감으로 갈등과 대소사를 처리해야 했다. 불면의 밤과 언제 놀랄 지 모르는 응급수술이 뒤잇기를 하던 때였다.
다만 운명은 그러하구나, 싶었다. 차를 타고 광활한 풀색 땅, 그녀의 감옥을 빠져나오며 그녀가 한국에 태어났더라면, 내가 그녀의 고향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그녀가 내 입장이었을 수도 있고, 내가 그녀와 같은 경로를 밟았을 수 있겠다 싶었다. 한달 뒤 한창 바쁜 중에도 그녀의 전화가 반가웠던 이유는 그런 상호명시 내지는 무례한 오지랖 때문이었다.
"컨, 퓨터, 배,우고, 싶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귓전에 생생하다. 그녀에게 컴퓨터는 동아줄이었을까. 결과부터 말하면 그녀에게 컴퓨터를 구해주지도 배우게 해주지도 못했다. 우선 지긋지긋한 예산 문제가 있었다. 시내까지 나오는 데만 운전하여 세시간 거리. 누가 그녀를 데려다주고 데려오면서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 지인들에게 우는 소리를 해서 오래된 컴퓨터를 기증받았는데 그녀의 남편이 반대하여 전달도 못했다.
열망이 스러지기 전 컴퓨터 배웠기를 기도
그 무뚝뚝한 남자분에게 내 생애 최고의 애교와 아첨을 노력하며 '엄마가 컴퓨터를 할 줄 알면 자라는 애들에게도 좋지요.'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컴퓨터없이도 잘 살아왔다고 화내며, 두 아이도 뫼만 모실 줄 알면 된다고 했다. 안내책과 함께 드릴테니 한번 놔두어 보시라 해도, 컴퓨터가 오는대로 바로 팔아버리겠다는 것이 아닌가. 환갑이 가까운 노욕을 당할 수가 없었다. 팀장님은 부부 불화를 키워서는 안된다는 업무 방침을 강조하셨다.
얼마 후 나는 사표를 썼다. 배우자의 곁에 있어야 했다. 안됐다며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의사와 면담하고 회사로 내려와 바로 상경 준비를 했다. 이렇게 관둘 걸 뭐 대단한 일이라고 여자가 지방까지 내려갔냐는 주변의 힐난이 이어졌다. 다들 피로감에 뱉은 방향없는 비난이었으리라. 수입없이 병간호는 어떻게 하냐는 소리를 동시에 들었으니까.
퇴사하던 날 팀장님은 지극한 표정으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택배로 보낼 내 짐을 보자 고개를 숙이고 들지 않으셨다. 나는 팀장님의 등을 향해 감사했다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 반짝이는 잡지 몇권과 립스틱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엘르, 보그, 메종, 입생로랑. 그녀의 일상과 먹먹한 거리가 있지만 어린 그녀에게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녀가 열망이 스러지기 전 컴퓨터를 배웠기를 기도한다.
/김인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