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27)
이용일 전 KBO 총재 대행의 야구 인생③
최 감독 부임 1년 3개월 만에 전국대회 우승
“대통령배쟁탈 제五(오)회 전국고교야구대회(중앙일보사 주최) 4일째 준준결승에서 군산상고는 강호 중앙고교를 六(육)대 0으로 물리치고 준결승전에 진출, 지난 四八(사팔)년 이후 二十三(이십삼)년만에 호남 고교팀의 전국규모대회 준결승 진출의 꿈을 달성했다.(아래 줄임)”-1971년 5월 8일 치 <동아일보>
전날(7일)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대통령배 준준결승(군산상-중앙고)에서 신예 군산상고는 나창기 선수의 5타수 4안타를 비롯한 장단 12안타로 대거 6점을 뽑아낸다. 한편, 김봉연, 송상복이 계투하여 중앙고 타봉을 산발 3안타로 처리, 예상을 깨고 완승(6-0)함으로써 호남 야구를 23년만에 전국 4강 대열에 올려놓는다.
그해(1971년) 8월에 열린 제1회 봉황대기쟁탈 대회에서는 우승팀 경북고와 2회전에서 격돌 14회 연장전 끝에 0-1로 분패한다. 그러나 10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 끝내 전국을 제패한다. 최 감독 부임 1년 3개월만의 개가였다.
창단 후 처음으로 전국대회 패권을 거머쥐며 군산의 야구 역사를 새롭게 장식한 군산상고 선수들. 이튿날 군산은 선수들 모교도, 관공서도, 다방도, 거리도 시내가 온통 잔칫집 분위기였다. 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금의환향한 선수들은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1971년 당시 군산상고 야구부는 김민성(대표), 송경섭(부장), 최관수(감독), 김성태(주장), 선수= 김봉연, 송상복(투수), 양종수, 최정수(포수), 하태문, 김성태, 나창기, 최병태, 김용배, 유희명, 양기탁, 현기봉(내야수), 김준환, 김갑순, 오덕환, 김복근, 조양연, 이현구, 김일권(외야수) 등으로 짜여 있었다.
전국 무대에서 인정받은 군산상고 황금 멤버들은 1972년 초 대부분 졸업한다. 하지만 해묵은 가지 잘라내면 새 가지가 더 우람하게 자라듯 선수층은 지난해와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초고교급 투수로 인정받는 김봉연과 날카로운 커브가 특기인 송상복이 마운드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정된 마운드와 김일권, 양기탁, 김준환, 양종수 등 강력 타선으로 이뤄진 군산상고 진용. 패기로 뭉친 선수들은 그해 7월 개최된 제26회 황금사자기대회 부산고와의 결승전 9회 말 드라마 같은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 ‘역전의 명수’로 거듭나면서 전국 고교야구 강자로 자리를 굳힌다.
그 후 이용일은 더욱 많은 야구 꿈나무를 배출하기 위해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 대회를 우승하는 극적인 장면을 중심으로 흑백 영상물(16mm)을 제작, 군산시와 옥구군 교육청에 보급한다. 아래는 1970년대 군산중앙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신진탁(77) 전북 숲 해설협회장의 추억담이다.
“군산중앙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는데, 어느 날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이 잠깐 보자고 한다고 해서 갔더니 강성국 당시 군산시 야구협회장과 함께 있더라고.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용일 사장 사비로 제작한 영상물을 특별활동 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없겠느냐고 묻기에 좋다고 했지.
30분 분량으로 처음에는 시내 학교에서만 상영했는데 반응이 좋아 변두리(옥구군) 학교로 확대해나갔지.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했는데 야구를 싫어하는 학부모들이 학교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바람에 서초등학교로 쫓겨났다니까. (웃음) 지금 생각해도 당시 이용일 사장과 강성국 회장의 야구사랑은 놀라울 정도였어.”
“군산상고는 제2의 모교다. 선수 생활은 7년밖에 안 했지만, 평생을 야구와 함께 멋지게 살아온 것 같다.”라고 말하며 껄껄 웃는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 팔순을 훌쩍 넘긴 그의 목소리는 40대 못잖은 열정이 넘쳐났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묻자 “서울대학교에 ‘코치 아카데미’를 개설했는데, 이곳저곳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와 바쁘게 지내고 있다.”라며 대화 흐름을 프로야구로 돌렸다.
군산상고 우승 행진, 고교 야구 붐 일으켜
“동아일보사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 주최한 황금사자기쟁탈 제二十六(이십육)회 전국지구별초청 고교야구 쟁패전은 군산상고에 그 영예가 안겨진 가운데 19일 밤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약 三萬(삼만)의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야간 경기로 벌어진 군산상고-부산고의 결승전은 9회 말 4-1로 리드당한 군산상고가 끈질긴 추격전으로 극적인 역전신(5-4)을 엮는 파란만장의 연속이었으며 야구사상 일찍이 보기 드문 기사회생의 산표본이기도 했다.”-1972년 7월 20일 자 <동아일보> 기사
이어 신문은 “장단 21개의 안타가 작렬하고 쫓고 쫓기는 숨가쁜 공방전이 벌어지기 장장 2시간 40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열전은 끝내 집념을 버리지 않은 군산상고에 행운의 여신이 내려앉은 셈이다”라고 덧붙인다.
무더운 여름밤. 짜릿한 9회 말 역전 결승타로 제26회 황금사자기 우승을 쟁취한 군산상고는 호남 야구 중흥의 기수로 떠오른다. 또한, 그해(1972) 가을부터 1976년까지 4년 동안 전국규모 야구대회에서 보여준 저력(우승 4회, 준우승 4회)은 서울과 영남권에 갇혀 있던 고교야구의 빗장이 전국으로 열리는 계기를 마련한다.
군산상고는 경기마다 박진감 넘치는 명승부를 보여주며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하게 된다.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 돼야 관중이 차던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야구장)은 8강전부터 입장권이 매진되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군산상고 경기가 주말이나 휴일과 겹치면 서울 시내 직장인과 고등학생들이 운동장에 나와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1950년대 후반부터 야구 후원자로, 매니지먼트(management)로 활동하였고, 한국 프로야구 출범을 막후에서 주도했던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의 회고를 들어본다.
“군산상고 우승 행진은 고교야구 붐을 일으켰지. 1974년 충남 공주고, 1976년 천안 북일고가 창단했어. 광주일고 출신 김종태(전 광주일보 사장)는 회사까지 찾아와 ‘선배님 저도 전남에 야구를 키워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라며 자문을 구하더군. 진흥고, 동신고, 광주상고 야구부도 그때 만들어졌지. 그 후 충청·호남 팀들이 참가하는 지역 대회도 개최했어. 수도권과 영남권에 비해 경기 경험이 일천했던 팀들이 실전경험을 쌓으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실력이 향상됐지.
그리고 내가 몇 사람을 만났어. 동대문구장 근처에 사는 호남 출신 상인들은 수시로 응원하러 왔고, 청계천 의료공장 잡부 한 사람은 광주일고나 군산상고 경기가 있는 날은 사장에게 사정해서 나온다는 거야. 마음대로 큰소리치면서 응원할 수 있는 경기장은 야구장밖에 없어서 온다는 사람도 있었지. 1975년 광주일고의 대통령배 우승, 1977년 공주고의 대통령배 우승 등 충청·전라 고교야구팀들의 부활이 그들을 불러들였던 거야.”
군산상고가 유달리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또 있었다. 1970년 7월에 이어 1974년 4월에 발생한 경성고무(사장 이용일)의 대형 화재, 최관수 감독의 파킨슨병 투병, 선수들의 인간애 넘치는 휴먼스토리 등 ‘역전의 명수’ 주역들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보도되면서 팬들을 안타깝게 하거나 감동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고고 야구를 다룬 영화 <자! 지금부터야>(1977년 개봉, 감독 정인엽)도 한몫 더했다.
고교야구는 천안 북일고가 제10회 봉황대기에서 우승을 쟁취하는 1980년을 기점으로 전국 평준화가 이뤄지면서 국내 최고의 스포츠로 자리매김한다. 관중도 지역 연고보다는 좋아하는 팀이나 선수의 경기 모습을 보려고 운동장을 찾는 팬들이 늘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프로야구 개막을 앞당기고, 지역 연고제가 성공하는 바탕이 된다. (계속)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책 및 나이는 2013~2014년 기준임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