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5·18 민중항쟁 발화지점...최초 '희생자' 이세종 열사, 역사 뒤안길 묻힐 뻔

[진단] 5·18과 전북

2020-05-17     전북의소리
이세종 열사 추모비(전북대)

5·18 민주화운동이 어언 40주년을 맞는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민주화의 획기적인 디딤돌이 된 5·18 민주화운동이 다행히도 이제야 역사의 제자리를 찾는 듯하지만 미완의 과제들이 산적하다.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민주화운동이자 민중항쟁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왜곡되고 그 가치가 축소됐다. 심지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엔 기념식에서 부르던 제창곡까지 권력이 개입해 통제하는 형태가 반복됐다. 이 바람에 정작 중요한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민주화를 향한 긴 도정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40주년을 맞는 지금도 ‘광주의 살육’을 주도했던 전두환은 ‘모른 척’, ‘미친 척’하고 있다. 미완의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때문이다.

또 다른 미완의 규명은 광주와 인접한 전북에 대한 당시 상황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5·18하면 광주만을 떠올리기 쉽다. 이웃인 전북은 5·18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한낱 변방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북은 5·18과 직접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항쟁의 발화지점이었음을 여러 자료와 기록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북대 최초 5·18 희생자 발생

5·18 첫 희생자, 고 이세종 열사

당시 상황을 언론에 보도된 기사와 학술자료들을 통해 다시 복기해 보자. 먼저 1980년 5월 17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전북이 최초 5·18 발화지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5월 17일 밤 10시 이후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는 학생들 약 40여명의 모여 있었다. 당시 철야농성을 계속해오던 학생들은 불안한 정국 속에서도 투쟁방향 등을 논의하고 있었다.

계엄군의 진입소식을 듣고 김남규 학원자율화 추진위원장, 이광철 민주화투쟁위원장, 이송재ㆍ최인규(복적생) 등 학생지도부는 피신했으나 나머지는 체포됐다.

당시 제주도를 포함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계엄확대조치에 따라 진행된 해산조치는 불과 30~40여 분 만에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북대 학생 한 명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바로 5·18 첫 희생자가 전북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세종 열사(당시 21세. 전북대 농과대)가 학생회관 아래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이 열사는 당시 호남대학총연합회 소속 연락책임자를 자임하며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서 농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집회에서 나눠줄 유인물 등사(복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자정께, 검은 베레모를 쓴 공수부대원들이 착검한 M16 소총과 긴 곤봉을 들고 학생회관에 들이 닥쳤다. 그 직후 18일 오전 1시께 학생회관 옆 바닥에서 온 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이 열사가 발견됐다. 경찰과 정부는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부검의였던 이동근 박사(전북대의대 병리학과 교수)는 유족들이 요청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용 의견서’에서 “이세종 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손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고 기록했다.

이 같은 내용은 비단 이 열사의 사인이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며 옥상에서 떨어지기 전 이미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 폭행당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 열사의 의로운 죽음이 세간에 알려지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열사는 이후 적어도 전북대에서는 민주화의 화신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여겨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무려 20여 년 만에 광주 망월동에 안장됐다.

김제 월촌 연정리에 누워있던 열사는 1999년 4월에야 광주 망월동으로 옮겨졌다. 전북대 학생회관 옆에 그의 비가 세워지는데 5년이 걸렸고, 명예졸업장을 받는데 15년이 필요했다.

이세종 열사  추모비(전라고)

계엄확대 조치와 그 일환으로 진행된 각종 체포와 구금이 바로 5·18의 서막이라고 볼 때, 이세종 열사의 죽음은 5·18과 관련한 첫 희생자이다.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가 2000년에서야 한 학술 세미나에서 “5·18 최초의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5·18 최초의 희생자는 바로 이세종 열사”라고 밝히면서 학계에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를 목격했던 전북대 총여학생회장 이었던 문희선 씨(62. 당시 사학과 3년)와 김성숙 씨(62. 당시 국문과 2년)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5월 17일 밤 10시 이후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라고 표현했다.

학생회 간부들은 “학생회관에서 체포된 약 35명의 학생이 차 한대에 정확히 새벽 3시 30분까지 갇혀있다가 전주경찰서에서 4시부터 조사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5ㆍ18 이후 이뤄진 전국 최초의 고교생 시위

1980년 5월 27일 당시 전주신흥고등학교 모습 당시 전주신흥고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S자를 그리며 "독재 정권 물러가라"를 외치고 있다. /전주신흥고

전북지역에서 5ㆍ18과 관련된 사건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전북대 시위현장에서 체포, 구금된 사람이 35명에 달했다. 현장에서 죽은 이세종 열사와 체포된 문희선 씨, 김성숙 씨 등도 포함된다. 비단 전북대 뿐만 아니라 전북공전 장우섭 씨, 원광대 성경환 씨(MBC 전 아니운서), 한일장신대 김명희 씨, 원광대 강익현 씨(전 도의원), 원광대 총학생회장 라경균 씨, 군산대 총학생회장 최병렬 씨, 전주대 총학생회장 심영배(전 전주시의원) 씨 등은 온몸으로 항거했다.

또한 5월 18일 직후 전주시내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광주살육작전' 유인물을 배포하고 민주화를 외친 사람들이 있었다. 한상열 고백교회 목사, 노동길 전 도의원, 이승희 씨 등이 바로 이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신흥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이다.

5ㆍ18 이후 이뤄진 전국 최초의 신흥고 시위는 5월 27일 발생했다. 당시 고교생이었던 이강희 씨, 이우봉 씨 등은 구속되면서 제적됐다 13년 만인 지난 1994년 2월에야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 5ㆍ18을 알리다가 피습, 징계를 받은 종교계, 교육계, 공무원들도 적지않다. 당시 여산성당 박창신 신부는 군인에 의해 테러를 당했고 이리시청 공무원 황세연 씨는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한국민주화운동사 자료에 따르면 전북대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하던 김희수 총학생회장(전 도의원)은 3천 여명이 참가한 시가지 데모를5ㆍ18 직전인 5월 2일 주도하다 체포돼 장기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고, 총학생회 부활운동을 주도했던 김남규 씨는 체포돼 선고유예를 받아 석방됐으나 석방 1주일 만에 강제 징집돼 녹화사업(운동권 학생 정신개조)의 희생양이 됐다.

그런가하면 김제의 야학팀 등 군 단위에서 광주만행을 알리다 구속된 하연호 씨, 이상호 씨 등도 있었다. 80년 5·18 이후 신군부는 유언비어 유포와 사회정화라는 명분 등으로 사회 각층의 민주화 인사를 탄압·격리하면서 집권을 위한 체제를 갖춰나갔고, 항쟁과 고난은 계속됐다.

그해 6월 25일 밤에는 익산군 여산면 여산리 여산 천주교회 사제관에 공수부대원으로 보이는 괴한 4명이 침입해 박창신 주임신부와 신도 임을영 씨(당시 26세)를 쇠파이프와 흉기로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다.

당시 박창신 신부는 5월 21일, 이 내용을 강론하면서 옥외 확성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알렸다. 여산성당 마전공소에 다니던 여중생 유영희 씨, 현미숙 씨, 김양순 씨는 이 유인물을 주민들에게 배포하다 충남 강경 경찰서에 잡혀갔고, 신근리 공소의 신도회장 이명구 씨도 대전에 있는 충남 계엄사로 연행됐다. 

5ㆍ18 이후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인물과 시위가 번지자, 신군부는 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냈다. 80년 8월 31일 전북대 20여 명, 원광대 2명, 군산대 1명이 제적을 당했다. 신군부의 대대적인 숙정(사회정화)으로 인해 전북대에서는 남정길ㆍ김용성ㆍ이석영ㆍ변홍규 교수 4명이 해임 당했다. 8월 말에는 이리시청 직원 황세연 씨가 친구에게 광주의 참상을 담은 편지를 보낸 것이 발각돼 2명이 구속됐다. '이리시청 직원 반공법 위반 사건'이다. 황 씨는 징역 1년을, 그에게 광주 현장을 목격한 이야기를 한 백화점 직원 이길야 씨는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 5·18과 전북', 전후의 사건들

5월 17일 밤 9시 40분: 정부, 비상계엄 전국 확대, 대학 휴교 등 계엄포고 10호 발표.

5월 18일 자정: 계엄 확대, 공수부대 대학 진입, 학생 연행, 첫 사망자(전북대 이세종) 발생.

5월 27일: 전주신흥고등학교 시위 발생.

6월 17일: 계엄사 지명수배자 3백 29명 발표.

6월 25일: 여산성당 박창신 신부 테러사건.

7월 3일: 계엄사, 지명수배자 중 2백 47명 자수, 1백 44명 훈방, 3백 75명 계속 조사중이라고 발표.

8월 2일: 계엄사, 광주항쟁 관련 조사자 1백 62명 훈방.

8월 31일: 전북대 교수 해직, 전북대, 원광대, 군산대 시위관련 학생 제적. 이리시청 직원 반공법위반 구속사건.

9월 4일: 전남북 계엄분소, 1백 75명 군사재판 기소 발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한국민주화운동사' 자료에 의하면 5ㆍ17 전후 전북지역 피해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전북대

김남규(축산 4) 선고유예. 이광철(철학 4) 징역 1년. 김운주(농 4) 징역 1년, 집유 2년. 김병태(농 4) 집행유예. 윤성모(농 4) 공소취하. 최인규(기계공 3) 징 1년. 김희수(경영 3) 징역 6월. 황덕구(경영 3) 집행유예. 김중길(축산 3) 집행유예. 최만호(경제 3) 집행유예. 배현식(정외 2). 집행유예. 이상보(의학 4) 형집행 면제. 이승희(사회계열 2) 징역 8월. 박영식(인문계열 1) 장기10월,단기6월. 정해동(사회 3) 징역 10월. 강형근 기소유예. 김동수 집행유예. 박종훈(원예 4). 이상철 집행유예. 이충래 집행유예. 김성규 집행유예.

원광대

강익현(한의 본3) 집행유예. 라경균(법 3) 징역 6월. 성경환 집행유예.

군산대

문성주(경영 3) 집행유예.

한일신학교

김명희 집행유예.

기타

이상호(당시 31,고교 교사) 징역 1년 선고,  노동길(전북대 졸) 징역 1년6월, 이우봉(신흥고 3) 징역 8월, 이강희(신흥고 3) 징역 8월, 황세연(이리시청 직원) 징역 1년, 이길야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사망자

이세종(전북대 농대 2) 80년 5월 18일 자정께 사망.

임균수(원광대 한의 본2) 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피격 사망.

오세현(74년 전주고 졸) 5월 18일 새벽 광주 동아제약 옥상에서 피격 사망.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한다고 끝난 게 아니다

다시, 40주년을 맞는 5·18.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민주화운동이자 민중항쟁이지만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발포 명령자와 헬기 기총소사 책임자 규명 및 처벌 등이 답보 상태로 이어져 온 때문에 희생자 가족들은 물론 광주시민들의 한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오월, 광주시민 분노 더욱 부추긴 이명박-박근혜 정권

다행이 촛불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맞는 기념식은 달랐다. 3년 전 37주년 기념식은 역대 최대 규모의 국민 개방 행사로 치러져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시 제창할 수 있게 되면서 광주 시민들은 물론 지역언론이 무척 고무된 분위기였지만, 미완의 진상규명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부터 2008년까지 기념식에서 줄곧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됐다. 그러던 것이 2009년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합창으로 바뀌고 말았다.

당연히 기념식 의미도 크게 퇴색됐다. 매년 오월이면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되레 더 부추겼다. 또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단이 부르면 원하는 참석자만 따라 부르는 방식으로 바뀌어 5·18 단체와 시민들은 이에 반발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 방식으로 부르도록 하면서 많은 시민들은 반갑고 다행스런 일이라고 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쉽고 찜찜한 대목들이 남아 있다.

서울언론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지나친 호들갑 '눈살'

대부분 서울 언론들은 5·18 기념식에서 그동안 제대로 맘껏 못 부르던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를 이제는 제창으로 부르게 되면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환원된 것처럼 연신 반기는 분위기였다.

5·18 기념식에서 제창하던 노래를 10여년 만에 다시 부를 수 있게 돼 다소나마 위상을 회복하게 된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과 희생자 가족들은 민주화운동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다 풀지 못하고 있다. 진상규명이 여전히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전두환이 회고록을 통해 자신이 오히려 '광주사태의 제물이 됐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발포 명령까지 부인해 광주 시민들과 희생자 가족들의 분노를 더하게 했다. 이런 와중에 극우 세력들은 아직도 5·18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치면서 숭고한 민주화운동의 희생정신을 훼손하고 있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5·18 당시 광주 전일빌딩(옛 전남도청 앞 빌딩)에 헬기 사격이 가해졌으며 M60 기관총 탄흔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자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거셌다.

광주시는 5·18 당시 신군부가 사전 계획 아래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진입 과정에서 전일빌딩에 헬기 사격을 가했다는 증거 자료를 공개했다. 하지만 당시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무참하게 살상당한 전남도청 앞 발포(1980년 5월 21일)를 누가 명령했는가에 대해선 지금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완의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질 때,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이들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세력들도 비로소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전북의소리>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