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때로 ‘이익’보다 ‘공정’을 중시하는가? :‘위선’에 관한 단상
강준만 교수의 명언 에세이③
위선의 사회적 장점과 혜택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공물(貢物)이다.”
17세기 프랑스 작가로 풍자와 역설의 잠언으로 유명한 라 로슈푸코(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의 말이다. 이는 위선이 그 기만성과 반도덕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미덕이 악덕에 비해 우월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시인하고 확인함으로써 미덕의 유지와 확산에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국가의 가장 현저한 도덕적 특징은 아마도 위선일 것이다.” 미국의 신학자요 정치학자요 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1932)에서 한 말이다. 국가는 위선의 그런 기능을 이용해 개인의 충성심과 헌신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국가의 위선은 정치적 차원에선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철학자 제임스 스피겔(James S. Spiegel)은 [위선(Hypocrisy)](1999)에서 위선에 대한 사회적 혐오와 증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선을 저질러선 안된다는 강한 경계심을 자극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도덕성 함양에 기여한다고 했다.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김광기는 <위선이 위악보다 나은 사회학적 이유>라는 논문에서 사회의 기만적 그리고 허위적 성격을 부각시키면서 “위악은 실제로 악에 도달하게 되고 위선은 실제로 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나은 이상과 선, 혹은 개선을 위해서는 위선과 과장된 겉치레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은 “위선을 떨다 보면 진심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며 위선을 옹호했다. 김영민의 말이 워낙 재미 있어 길게 인용할테니 독자들께서도 읽으면서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시기 바란다.
“사람들이 무턱대고 ‘위선의 빤스’를 내려버리면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 아름다운 내면 풍경이 아니라 쓰레기 매립지가 있다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누가 위선의 장막 아래 덮어둔 쓰레기를 구태여 들여다보고 싶겠습니까? 들여다보고 싶다고요? 너 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요?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위선을 떠는 모습 말고 별도의 자아란 없으니, 위선 떠는 데 유의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죠. 그렇다면 위선의 빤스를 입은 사회는 하의실종의 야만 상태보다는 나을 겁니다. 누가 아나요? 위선을 계속 떨다 보면, 예식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다 보면, 어떤 내면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이상의 견해들은 위선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건 아니며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것이겠지만, 넓은 의미의 ‘위선 옹호론’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이런 ‘위선 옹호론’과도 통하는 ‘위선 불가피론’도 있다. 인간인 이상 위선을 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는 위선이 아니고서는 사회적 동물이 될 수가 없다.”
영국의 의사 겸 도덕 사상가인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 1670-1733)의 말이다. 그는 1714년에 출간한 풍자시 [꿀벌의 우화(Fable of the Bees)]를 통해 당시 영국 사회 모든 계층의 기만과 인간 본성에 대한 기성 도덕의 위선적 견해를 비판하고 나섰지만, 위선의 필요성은 인정했다. “자신이 하는 속생각이 남에게도 고스란히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면, 말을 할 줄 아는 이상, 남에게 상처받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도 “사회의 일반적인 의무들은 위선을 필요로 하고, 위선 없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우리 인간은 잠을 잘 때에만 위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영국 작가 윌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t, 1778~1830)의 말이다. 위선은 인간의 숙명이라는 이야긴데, 정도의 문제가 아닐까? 악의 없는 ‘하얀 거짓말(white lie)’이 있듯이, 에티켓 수준의 ‘하얀 위선(white hypocrisy)’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위선은 참아주기 어렵다.
“누구건 혼자 있을 때엔 진실하다. 다른 사람이 들어설 때에 위선이 시작된다.”
미국 철학자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의 말이다. 그렇다. 위선은 인간관계의 문제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심리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 심리가 기만적이거나 기만에 가까워질 때에 비로소 위선이 시작되는 것이다.
누구건 ‘위선 옹호론’과 ‘위선 불가피론’에 어느 정도 공감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대체적으로 위선에 대해 단호히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다.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타고 난 ‘공정’ 감각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위선은 공평성을 잠식한다.”
미국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쿠르츠반(Robert Kurzban, 1969-)이 [왜 모든 사람은 ‘나만 빼고’ 위선자인가](2010)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위선은 이탈리아 시인 단테(Dante, 1265~1321)의 [지옥]에 나오는 아홉 개의 지옥 중에서 제8지옥에 해당할 정도로 역겨운 것인데, 그 역겨움의 핵심은 위선이 공평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선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당위나 규칙을 역설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그렇게 말한 사람이 그걸 지키지 않는다면 불공평하다. 당위나 규칙을 역설하는 일이 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위선자가 되기 쉽다. 정치인과 지식인이다. 그런 특수성을 감안하자면, 그들이 특별히 더 위선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래서 쿠르츠반은 “나는 정치인들이 겉모습과 달리 우리보다 더 위선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을 믿을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말이다.
‘이익’보다 ‘공정’을 더 중시하는 ‘최후통첩게임’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공정성이나 공평성을 무시하거나 훼손하기도 하지만, 때론 ‘이익’보다 ‘공정’을 더 중시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크지 않거나 사회적 차원의 이익일 경우엔 공정을 택한다. 1982년 독일 경제학자 베르너 귀스(Werner Güth)가 생각해낸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은 그걸 잘 보여준다.
“게임은 2인 1조로 이루어지지만 당신과 상대방은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게임 규칙은 간단합니다. 제가 주는 10만원을 두 분이서 나눠 가지면 되는데 상대방이 당신에게 돈을 몇 대 몇으로 나누자고 제안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제안에 대해 당신은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를 결정하면 됩니다. 만약 당신이 상대방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상대방이 제안한 돈을 받을 수 있지만, 거절하면 당신과 상대방 모두 한 푼도 가질 수 없습니다. 기회는 한 번뿐이고 한 번 제안한 이후에는 협상은 없습니다.”
두 사람이 5대 5로 나누면 이 게임은 싱겁게 끝나겠지만, 그렇게 해서야 어디 게임의 묘미가 살겠는가. 게임이 시작되자 상대방은 당신에게 8대 2, 즉 자신이 8만원, 당신이 2만원을 가지라고 제안한다. 2만원이라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아예 안 받겠다고 할 것인가? 그간 이 실험에 응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몫이 3만원 이하일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 받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실험 결과는 이론 경제학자들이 가정하고 있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의 개념으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한 푼도 못 받는 것보다는 2만원이라도 받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밖의 결과 때문에 최후통첩 게임은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에 관한 이론 가운데 ‘죄수의 딜레마’에 필적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뇌·정신·행동연구센터의 책임자인 조나단 코헨(Jonathan Cohen)은 최후통첩 게임을 하는 피실험자들의 뇌를 촬영함으로써 ‘신경경제학(neuroeconomics)’이라는 분야를 개척했다. 인간은 불공정한 상황에 직면하면, 대뇌 안쪽에 있는 뇌섬(insula)이 강한 분노 반응을 만들어내고 그 순간 경제적 이익을 기꺼이 포기하면서까지 불공정에 맞선 행동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파렴치한 제안자가 나보다 많은 것을 얻도록 놓아두느니, 차라리 양쪽이 다 망하는 쪽을 택하겠다는 의사결정은 어리석은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미국 행동경제학자 케이윳 첸(Kay-Yut Che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어리석은 선택이 되는 것은 당신의 목표가 물질적인 이익에 한정된 경우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이 경우 불공정한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즉 불공정한 상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작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이것은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고의로 푼돈을 제시한 데 대한 분노,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앙갚음을 했다는 만족감의 문제인 것이다.”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그렇다. 우리 인간이 빵만으로 사는 건 아니다. 한국인들은 “배 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삶의 철학으로 생존경쟁에 임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이 그 점에서 유별나긴 하지만, 한국인만 그런 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피땀 흘려 일해서 거둔 성공을 배 아파하진 않는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이 큰 불로소득을 얻었다거나 할 때에 배가 아프다. ‘배 아픈 것’을 좀 점잖게 말하자면, ‘정의감’이나 ‘공정의식’이다. 자신이 손해를 좀 보더라도 정의에 반하거나 불공정한 것은 못 견뎌 한다는 말이다.
최후통첩 게임에서 돈의 크기가 크다면 어떨까? 호주 경제학자 리사 캐머런(Lisa Cameron)은 인도네시아에서 3개월치 월급인 20만 루피아를 나눠가지는 실험을 해봤다. 그랬더니 5만 루피아, 즉 25% 이하로 제안했을 경우에는 응답자의 대부분이 거절했다. 그들 중 일부는 30%를 준다고 했을 때도 거절했다. 5만 루피아면 보름 이상 월급에 해당하는 액수였음에도 ‘이익’보다는 ‘공정심’, ‘복수심’, 또는 ‘분노’에 압도된 것이다.
자신이 더 많이 갖겠다는 제안자의 파렴치함은 사회적 차원에선 위선의 문제로 연결된다. 사람들은 위선이 공평성을 잠식하기 때문에 위선에 분노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위선의 혐의를 받는 사람이 평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정의로운, 게다가 공정과 공평을 숭상하는 듯한 말을 많이 해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분노할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이 사회적 차원에서 그 어떤 대의(사회적 이익)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용납해선 안된다는 게 다수 사람들의 정의 감각이다.
여러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엘리트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도 필요악의 수준을 넘어선 위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니버는 특권계급이 비특권계급에 비해 더 위선적인 이유는, 자신의 특권을 평등한 정의라고 하는 합리적 이상에 의해 옹호하기 위해 특권이 전체의 선에 뭔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회의 불평등 상태는 합리적 변호에 의해서는 정당화될 수 없을 만큼 심화되어 있기 때문에, 특권계급은 온갖 머리를 짜내어 자신들의 특권이 보편적 이익에 기여한다는 이론을 옹호할 수 있는 교묘한 증거와 논증을 창안해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특권계급에는 머리가 좋고 유능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신들이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온갖 협잡과 무능력을 그럴 듯하게 둘러대거나 변호할 수 있다는 게 니버의 주장이다.
냉소주의를 키우는 ‘위선의 제도화’
속물은 끊임없이 위선과 가식을 저지른다곤 하지만, 속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오히려 위선과 가식의 정반대편에 선 ‘당당한 속물’도 있다. 개그맨 김구라를 보라. 그는 어느 모로 보건 속물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그걸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인기를 얻고 있잖은가. 주변에 혹 김구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 좋아하는지 물어보시라. 위선과 가식이 없이 솔직해서 좋다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올 게다. 방송은 원래 위선과 가식을 ‘예의’로 포장해 부추기는 미디어인데, 김구라는 그 문법을 깨고 보통사람들이 사석에서 가장 큰 신경을 쓰는 돈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걸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인기를 얻은 것이다.
신문과 방송 등 전통적인 미디어가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문제와 무관치 않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비교적 위선과 가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미디어다. 물론 너무 자유롭다 못해 방종의 수준으로까지 치달아 사회문제로 비화되곤 하지만, 어쩌면 기존 미디어의 세계보다는 그게 바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삶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이는 위기에 직면한 저널리즘이 앞으로 저널리즘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경쟁자들을 ‘위선자’로 몰아붙이면서 위악(僞惡)을 넘어선 각종 혐오발언을 정치적 무기로 삼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간 기성 매스 미디어는 문명의 이름으로 이런 사람들을 초전박살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그런데 SNS와 인터넷이 그 방어벽을 해체하면서 트럼프의 발판이 마련됐으니, 이 어찌 ‘미디어 혁명’이 만든 ‘트럼프 현상’이 아니겠는가. 트럼프 현상은 그간 극에 이른 ‘위선의 제도화’에 대한 반동으로 사실상 ‘위선의 종언’을 선언하고 재촉하는 현상이기도 하며, 이런 현상은 이미 우리 사회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
“철학이 말하는 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할 수 있는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자.”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말이다. 냉소주의의 재건을 주장하는 그는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으로 제시했다. 탈형이상학적인 현실적 삶에 대해 긍정하면서 건강하고 즐거운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자는 뜻에서 말이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한가지 생각해볼 점을 제시해주는 건 분명하다. 비단 철학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발설되는 당위적인 삶의 기준에 맞춰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왜 그런 당위에서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비판하는 걸까? 자신이 지키지도 못할 당위를 끌어안으면서 남에게 큰소리를 치는 모습에서 냉소주의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과도한 위선을 더욱 경계해야 할 이유라 하겠다.
/강준만(전북대 신방과 교수) /<사람과언론> 제7호(2019년 겨울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