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말도 없이 내 눈물에 비쳐, 둘도 되고 셋도 되나니

만언각비

2021-08-20     이강록 기자

올 광복절을 지내면서는 공연히 마음이 울연했다. 특히 홍범도 장군의 안장식은 지켜보는 이를 새삼 숙연하게 만들었다.

장군은 어쩌면 저리도 비장하고 늠름했을까. 장군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가시면서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꼭 고국에 데려가라”고 유언을 남겼다. 오로지 독립만을 고대했기에 전투에서 아들을 잃는 등 개인적 비극은 모두 감내할만큼 결곡했다. 카자흐로 강제이주 당하는 등 그 신산스런 삶을 의연히도 견뎠다.

사진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대회인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 촬영 영상 속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독립기념관 제공)

이런 위대한 지사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독립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그같은 무겁고 진지한 심사를 만해(萬海) 한용운 선생의 ‘해당화’가 그나마 조금은 다독여줬다.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들은 체 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이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야속한 봄바람은 불어 제껴 나는 꽃을 경대 위에 옮겨다 놓는데 눈물 아롱거린 눈에 꽃은 둘도 되고 셋도 된다. 피는 꽃 지는 꽃이 어디 꽃이기만 하겠을까. 오지 않고 애를 녹이는 임이요 당신, 즉 광복이겠지. 그리하여 만해는 조바심을 키웠겠지.

백살이 가까웠던 어떤 할머니가, 백발인 며느리에게 미안해서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잖은가. “올 모란이 지기까지는 소리 없이 꽃 지듯 눈감을 것이여.”

그해 모란이 피고 봄바람은 모란을 흔들었다. 할머니는 성한 몸을 애써 뉘고 창밖의 꽃을 바라보며 서러워 눈물지었지. 며느리는 부뚜막에 숨어 앉아 모란꽃 바람에 가슴을 쓸며 울었다. 그해 모란은 정말 몰래 졌고 할머니는 봄을 넘기셨다. 이듬해 모란꽃 다시 이울 때, 어머니는 돌아간 할머니의 그 말씀 떠올리며 다시 울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 아는 것, 가장 위대한 사랑

그렇지. 세상 일이 어디 환하고 화사하기만 하든가. 그 뒤에 알 듯 모를 듯 사연과 곡절이 숨어있는 법이지. 그렇다면 이 풍진 세상을 어찌 헤쳐나가야 하는가. 오로지 자기 몸 자신이 간수하고 지키는 게 현명할 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는데… 허나 어느 시인은 이렇게 탄식한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그런데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그랬다. (정호승 ‘술 한잔’) 그만큼 인생이란 야속하고 속절없는 놈이다. 이 시인은 그러나 그처럼 울적하고 억울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고 한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그럼 조금은 위안이 되겠지. 그러니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고 시인은 권한다. (정호승 ‘선암사’)

미상불 이 시인은 선암사 보물이 승선교만이 아님을, 꼭 아름다운 것만이 보물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몇 번을 더 읽은 뒤 곱씹어 본다. 누구에게나 살아오면서 힘들고 억울하여 가슴속에 쌓인 것들을 풀어놓고 털어놓을 장소나 대상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나만의 ‘선암사 해우소’를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인지.

이 시인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동안 한 움큼 움켜쥐고 살아왔던 모래가 꼭 쥔다고 쥐었으나 이제는 슬슬 손아귀 밖으로 슬슬 다 빠져나가고 말았다. 손바닥에 오직 한 알 남아 있는 모래가 있다면 그것은 시(詩)의 모래일 뿐”이다고. “그 모래는 언제나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제 혼자서라도 기차를 타야겠다. 철길에 꽃은 피었다 지겠지” 라고 시인은 말한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시인의 말에서)

살다 보면 괴롭고 슬플 때가 많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상처 주는 사람이 많아서, 마음을 짓누르는 걱정거리가 넘쳐서, 앞길이 막막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몸이 중한 병에 걸려서, 사랑에 실패해서…. 그럴 때 ‘기차’는 우리에게 위로의 손을 내민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여기서 ‘기차’는 승용차, 자전거, 모터사이클, 비행기 등으로 바꿀 수도 있다.

나이 먹으나 젊으나 마찬가지다. 다만 젊은이들은 목표와 야망 때문에 이것저것 다 유예시키고 우선순위에서 조정할 것이므로 약간의 차이는 있겠다.

모든 것을 잡아먹어 무너뜨리는 시간이란 존재

여기서 존 R. R. 톨킨의 <호빗>에 나온 수수께끼를 하나 낸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잡아먹는다. 새들, 짐승들, 나무들, 꽃들, 무쇠를 갉아먹고, 강철을 깨문다. 단단한 돌을 가루내버린다. 왕들을 죽이며 마을을 폐허로 만든다. 그리고 태산마저 무너뜨린다. 이것은 무엇인가?” 답은 바로 시간이다.

모호(模糊), 순식(瞬息:눈 깜빡일 동안의 틈, 즉 ‘눈 깜짝할 새’를 말한다), 탄지(彈指: ‘손가락을 튀길 동안’으로 그만큼 짧은 시간), 찰나(刹那), 허(虛), 공(空), 청(淸) 정(淨).

이 낱말들은 모두 아주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다. 수의 단위로서 각각 10의-13승, 10의 -16승, 10의 –17승, 10의 –18승, 10의 –20승, 10의 –21승, 10의 –22승, 10의 –23승을 나타낸다.

시간은 세 가지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주저하면서 다가오는 미래, 화살처럼 날아가는 현재, 그리고 멈춰 서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과거가 그것이다. 우리에게 이제 미래의 시간은 주저하면서 다가오지 않는다. 현재처럼 화살같이 다가온다. 현재와 미래가 함께 같은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소중히 사용해야 한다. 시간의 낭비에 의해 인생은 더욱 짧아진다. 인생의 시간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효용가치가 달라진다. 찰나가 영겁이고 영겁이 찰나이다. 우리가 단 1초라도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얘기다.

이백(李白)이 어느 봄날 밤, 도리원에서 잔치 중에 그러지 않던가.(春夜宴桃李園序) “천지라는 것은 만물이 잠시 쉬어가는 여관이고 세월이라는 것은 영원히 지나가는 길손(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이라고. ”우리네 인생, 덧없고 짧음이 꿈과 같으니, 즐긴다 한들 그 얼마이겠는가(而浮生若夢 爲歡幾何)”라고.

짧고도 짧은 인생은 무릇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찌 드넓은 세상도 잠깐 머물다 쉬어가는 여관에 지나지 않겠는가. 억만 겁의 시간 속 찰나 중의 찰나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네 삶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승을 떠난다. 예외 없이 나그네처럼 이승을 떠나가는 게 무릇 인간들의 삶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지구상에 잠깐 여행객으로 왔다가 떠난다는 얘기다.

그러나 뭇 군상들은 그 짧은 여행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재물을 탐하고 증오와 시기·질투로 인해서다.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기에 ‘초로(草露)인생’이라고 하지 않던가.

부귀영화를 차지하려고 진흙탕 싸움하듯 하는 아귀다툼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똑같은 평등한 인간임에도 ‘슈퍼갑’ 노릇을 하려드는 정치꾼들도 난장판을 벌이다가 끝내는 간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시황제(始皇帝)도 불로초를 구하려는 우둔함을 고집한 채, 겨우 쉰을 채우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갔다. 나도 가고, 너도 가고, 그도 가는 게 삶이다. 예외는 없다.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