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중도’는 인기가 높아도 정치현장에선 전멸할까? : 참여에 대한 단상
강준만 교수의 명언 에세이②
“정치에 무관심하면 악당들이 지배하는 대가를 치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427-347 B.C.)의 말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바보들의 통치에 당하고 살아야 한다.” ‘바보’나 ‘천치’를 뜻하는 영어 ‘idiot’의 옛 그리스어 어원이 시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채 사적 삶에만 갇혀 지내는 사람을 의미했을 정도로, 참여는 늘 미덕으로 통용돼 왔다. 물론 참여를 할 수 있는 자격에서 그 시절의 참여는 오늘날과는 크게 다르지만, 오늘날의 버전으로 해석하자면, 결국 대중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각자 먹고 살기 바쁜 대중의 입장에선 그게 영 쉽지 않다는 데에 민주주의의 딜레마가 있다.
“사회주의의 문제는 너무 많은 저녁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말이다. 참여와 토론을 하느라 당원들의 시간을 너무 많이 요구한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린드(Robert S. Lynd, 1892-1970)는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1939)에서 당시 소련의 참여 문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당이 여전히 선동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행동주의는 당원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확산된다. 그 결과 예컨대 모스크바 시 전체 성인 인구의 절반이 넘는 수가 사회적 통합 사업에 어떤 형태로든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좌파 성향이 강했던 린드는 ‘능동적 참여’라고 했지만, 사실상의 ‘강제적 참여’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공산당이 사회 분위기를 강하게 통제해 개인들에게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압력을 가했다면, 그걸 어찌 능동적 참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식으로 피상적으로만 보자면, 북한도 ‘참여 선진국’이라는 어이 없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전에는 정치, 종교, 예술, 운동에 직접 참여하던 우리들이 지금은 대리인들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Robert Park, 1864-1944)가 1918년에 한 말이다. “전에 우리가 공유하던 모든 형태의 공동체 활동과 문화적 활동은 전문가들이 가져갔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행위자가 아니라 구경꾼일 뿐이다.”
“값싸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들이 다양하고 많아졌다는 것이 사람들의 정치적 관심의 이탈을 불러온 큰 원인이다.” 미국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가 파크의 위 발언이 나온지 몇 년 후에 한 말이다. “사람들은 아직 공중의 구성원으로서 미흡한 상태에 있는데, 오락거리와 직업의 일 부담이 너무 많아 효율적으로 공중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단체의 형성에 많은 생각을 쏟을 수 없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싸고 쉽게 오락 수단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워싱턴이 할리우드와 경쟁할 수 있겠는가”
“평범한 미국 시민의 참여는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선거에 국한된다.”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 1898-1987)이 [미국의 딜레마](1944)에서 한 말이다. “평범한 시민들은 정상적인 삶의 일과로서 자기 지역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했다. 노조, 협동조합, 그밖의 공익 조직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시민들의 기권이 도드라져 보인다.”
“대중적 참여가 없는 민주주의는 마비돼 사망하기 마련이다.” 미국의 급진적 빈민운동가이자 지역사회 조직가인 사울 알린스키(Saul Alinsky, 1909~1972)가 [래디컬: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Reveille for Radicals)](1946)에서 한 말이다. “우리 인민 대중의 대다수는 이 나라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거나 자신들이 할 일이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어떤 욕망이나 능동적 행위의 결과로 민주주의를 포기한 게 아니다. 그들은 좌절, 절망, 무관심에서 비롯된 자포자기의 수렁으로 내몰렸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포기한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간 눈부신 성장을 해온 대중 엔터테인먼트가 다시 참여를 막는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어떻게 워싱턴이 할리우드 및 브로드웨이와 경쟁할 수 있겠는가.” 미국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1909-2002)이 [고독한 군중](1950)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매스미디어 비판자들은 일반적으로 미디어가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워싱턴이 할리우드 및 브로드웨이와 경쟁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제기되곤 한다.” 참여엔 시간과 관심이 필요한데, 이 점에서 정치는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로 대변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경쟁 관계에 놓여 있던 셈이다.
“수동적인 '방관자 민주주의‘로부터 능동적인 ’참여 민주주의‘로 변화되기만 하면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의 위협을 격퇴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1976)에서 한 말이다. 그는 참여민주주의에서는 “공동체의 사안들이 개별 시민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사적인 사안들만큼이나 긴밀하고 중요하며, 나아가서 공동체의 행복이 각 시민들의 사적인 관심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은 영원한 꿈이다. 참여의 비용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참여는 먹고 살기에도 바쁜 개인들에게 시간, 에너지, 노력을 요구한다. 게다가 제도적 여건과 환경도 참여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어진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사람들을 되도록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헌법적 통치, 선거제도 및 미디어 시스템을 선호한다.” 브라질 출신의 미국 철학자 로베르토 웅거(Roberto Unger, 1947-)가 [민주주의의 현실: 진보적 대안(Democracy Realized: The Progressive Alternative)](1998)에서 한 말이다.
“정치인들은 ‘최대 다수의 최소 참여'를 원한다.” 영국 정치학자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 1944-)가 [포스트 민주주의: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2005)에서 한 말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기득권이 달려 있는 기존 체제 유지를 위해 대중의 광범위한 수동적 지지를 원한다. 즉, 참여의 범위는 넓어야 하지만 강도는 매우 낮아야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데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말로는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지만, 그건 대중이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기에 그냥 해보는 말일 뿐이다. 또 실제로 가급적 적극적 참여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은밀하게 애를 쓰기도 한다. 이게 바로 ‘최대 다수의 최소 참여(maximum level of minimum participation)'다.
“시민은 중도를 선호하는데 정치는 양극화되어 간다”
그러나 ‘최대 다수의 최소 참여'가 꼭 시장자유주의자들이나 정치인들의 뜻대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미국인들은 갈수록 중도를 선호하는데 정치현장을 지배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양극화되어 간다.”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D. Putnam, 1941-)이 [나 홀로 볼링: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2000)에서 한 주장이다. 정치적 신념과 열정이 강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고 그들 중에서 정치인들이 나오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중도를 원하는 유권자가 많음에도 중도는 정치 현장에선 전멸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중도가 적잖은 표를 얻는 일도 일어나긴 하지만, 그 수명은 매우 짧다. 한국이 미국에 비해 더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중도는 늘 40%대 이상의 지지를 받고 보수와 진보는 각각 20%대의 지지에 머무르고 있지만, 정치는 오직 ‘진보 대 보수’의 대결구도이니 말이다.
2014년 한국갤럽 조사에서 보수는 25.0%, 진보는 22.2%인 반면, 중도층 비율은 52.8%로 나타났다. 2015년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조사에서 보수는 28.7%, 진보는 20.5%인 반면, 중도층 비율은 47.4%였다. 2018년 한국행정연구원 조사에서 보수는 21.2%, 진보는 31.4%인 반면, 중도층 비율은 47.4%였다.
그런데 왜 정치현실은 그렇지 못한 걸까? “대통령제 아래서 ‘중도’는 신기루”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긴 하다. 모든 정치가 대통령에 대한 찬반 구도로 흐르는 상황에선 중도가 설 땅이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국 정치현실에서 “온건·중도파가 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라는 말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이념적으로 중도파에 속하는 지식인일지라도 중도를 표방했다간 춥고 배고파진다. 어느 보수 지식인과 진보 지식인이 사석에서 했다는 다음 말에 공감할 사람들이 많을 게다. “중도는 설 땅이 없죠. 좋든 싫든 한 진영을 선택해야 발언과 영향력, 자리와 계급을 보장받거든."
대통령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게 꼭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까? 대통령 선출의 승자독식제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확산시키는 게 대통령제의 필연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면, 문제의 핵심은 사회적 차원의 이익 분배 방식, 그리고 이 방식의 동력이 되고 있는 ‘참여의 불균형’에 있는 게 아닐까?
당파성이 매우 강한 열정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과잉이거나 계층·세대별 참여의 불균형이 나타날 경우 ’정치적 양극화‘ 등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민주주의의 역설(paradox of democracy)'에 직면하게 된다. 반면 중도파는 아무리 머리 수가 많아도 그들에겐 열정이 없다. 이게 바로 이른바 ‘1% 법칙’이 작동하는 배경이다.
“거주의 안정성은 시민적 참여와 연결되어 있다”
원래 ‘1% 법칙’은 미국의 마케팅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법칙이다. 처음엔 웹사이트의 콘텐츠 창출자는 전체 이용자의 1%라는 사실에서 출발했지만, 이젠 어느 분야에서건 꼭 1%가 아니더라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전체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걸 가리켜 ‘1% 법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 법칙’은 한국에서도 입증됐다. 2018년 네이버에서 댓글을 작성한 회원은 전체 회원의 0.8%에 불과했다. 6개월간 네이버 뉴스에 한 건이라도 댓글을 단 사용자는 175만여 명이었지만, 1000개 이상의 댓글을 단 아이디는 약 3500여 개였다. 전체 인터넷 사용자 인구 대비 0.008%에 해당하는 사람이 전체 댓글 여론에 영향을 미친 셈인데, 이게 바로 댓글 조작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이다.
시민의 참여는 민주주의와 정치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한 전제 조건이지만, ‘1% 법칙’은 ‘참여의 딜레마’를 말해준다. 누구나 절감하겠지만, 참여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시간과 노력은 곧 돈인데, 그들에게 참여를 하라는 건 목돈 내놓으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일지라도 정열이 없으면 참여를 너무 성가시고 힘든 일로 여긴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정치적 신념을 종교화한 사람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한다. 종교적 열정으로 뭉친 이들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바치는 ‘순수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순수성이라는 ‘도덕적 면허’를 앞세워 정치적 반대파에게 법과 윤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호전적 공격성을 보인다. 어느 집단에서건 이런 강경파는 1% 안팎의 극소수임에도 지배력을 행사한다. 뜨거운 정열로 똘똘 뭉친 그들은 참여를 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비해 ‘1당 100’을 넘어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론 다양성이 살아있는 광범위한 참여가 답이지만, 아직까진 이론일 뿐이다. 기본적인 참여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선 ‘거주 안정성’이 중요하다. “거주의 안정성은 시민적 참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D. Putnam, 1941-)이 [나 홀로 볼링: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2000)에서 한 말이다. 자주 이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지역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투표에서부터 자원봉사 활동에 이르기까지 참여율이 낮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은 세계 최악의 수준이다. 한국의 대표적 주거양식이 된 아파트는 상품이요 재테크의 수단이다. 그건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사는 것’이다. ‘살 집(house for living)’이 아니라 ‘팔 집(house for sale)’이다. 아파트의 긴 수명은 상품 회전을 빨리 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아파트 평균수명은 영국 140년, 미국 103년인데 한국은 고작 22.6년이다. 자기 아파트가 무너질 지경이라는데 ‘경축! 구조진단 통과’라는 플래카드가 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그래서 한국인은 진짜 노마드족을 제외하곤 세계에서 가장 자주 이사를 다니는 국민이 되었다. 매년 전체 인구 다섯 명에 한 명꼴, 1년에 약 9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사를 다닌다. 연간 읍‧면‧동의 경계를 넘어 이사하는 비율은 17.8%인데, 이는 4.3%인 일본의 4배에 달하는 수치다. 공동체? 사회? 그런 건 없다. 오직 ‘내 집’만 있을 뿐이다. 아파트 소유자는 이익을 위해 5년에 한 번 꼴로 이런 노마드 삶을 자청하지만, 셋방 사는 사람들은 “방 뺄래 방값 올릴래”라는 이분법적 요구에 의해 3년에 한 번 꼴로 이런 노마드 삶을 강요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참여의 가치를 역설하는 건 참으로 힘이 빠지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이래저래 참여는 우리의 영원한 숙제다. 그것도 매우 풀기 어려운 숙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있다. 너무 거창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각자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문제를 풀어가 보자는 것이다. <사람과 언론>이 참여를 위한 작은 공론장으로 출발해 점차 그 범위를 넓혀나가는 성공을 거두길 간절히 바라는 이유다.
/강준만(전북대 신방과 교수}/<사람과 언론> 제6호(2019년 가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