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후보 대통령 뽑을 수는 없다
만언각비
세상이 저절로 잘 돌아가는가. 그런 것 같지만 결코 저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선(善)의지와 착한 동력도 작용하지만 엄연히 악(惡)의지와 나쁜 동력도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세상이 저절로 잘 돌아간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아니면 둘이 뒤섞인 방향이든 어떤 의지나 책략에 의해 꾸며져 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번 돌아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디 그리 허술하고 만만한 곳이던가. 아무런 의지와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어떤 안간힘이나 발버둥도 없이 얻어지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설사 생각지도 않은 엄청난 횡재나 예기치 않던 행운마저도 모두 까닭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인과의 법칙이라 해도 좋다. 또는 섭리이건 인연이건 마찬가지다. 단지 표현마다 다를 뿐이다.
그렇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제 욕심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자신을 마치 선(善)의 화신으로 미화 내지는 착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가. 이즈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보노라면 참으로 가관이다.
진정으로 막중한 지위에 걸맞은 준비와 수양을 해왔는지, 한 나라와 시대를 책임지고 감당할 도량과 역량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해왔는지 돌아봤어야 한다. 그런 엄중한 성찰과 돌이킴도 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결정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본인들은 스스로에 도취돼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국민들은 이미 안다. 누가 돌이고 누가 옥인지.
얼치기 후보 대통령 돼서는 안 돼
반풍수 집안 망친다고 하지 않든가. 지금의 현실을 살펴보자. 그만한 자질도 안 되면서 되는 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아는 척, 그건 얼마든지 자유다. 이런 사람 대통령이 되고자 꿈꾸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여야 한다. 이런 얼치기 반풍수 인사가 대통령이 돼서야 될 일인가.
그중 어느 한 사람 예를 들어본다. 최근 그가 쏟아낸 말을 들춰보자. 대략 간추린다.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안 됐다.” “노동은 주 120시간” “부정식품도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대구지역이니까 민란 안 일어났다.” 이한열 열사 사진 보고 “부마항쟁이던가” “암 걸려 죽을 사람 임상시험 전 신약 쓰게 해줘야” “박근혜 구속 가슴 아파” 이밖에도 많다.
사람마다 생각과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 사실도 모르다니 어처구니 없다. 자질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동시대를 사는지조차도 미심쩍다.
이런 생각과 판단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니. 대통령이 되겠다니. 그의 입에선 나오는 말마다 실언이고 망언이다. 공부가 덜된 게 아니다. 기본 자질이 안된 거다.
단지 정치 초보의 인식이라면 문제 될 것 없다. 그러나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의 인식이라는 것이 문제다. 이만저만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라면 가히 딴 세상을 사는 사람 아닌가.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국정을 맡아 통수한단 말인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그저 아무런 사심 없이 자기 일에 관한 판단을 할 때라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다. 이내 자기가 착각했다는 걸 깨달을 테니까.
미국의 풍자가 윌 로저스가 그랬다.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개인의 일에만 그친다면 크게 곤란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국정에 연결된다면? 국민의 삶과 관계된다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면? 그야말로 파국이요 재앙이다. 그러니 국정 최고 통수권자의 선출은 중차대한 일이고 신중하고도 현명한 선택이 돼야한다.
무엇인가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그래서 항상 알고자 하고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그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인식을 하는 사람들의 결정이라면 뭣 때문에 걱정하겠는가. 불확실성이 없는데.
그러나 무의식적이건 본인도 모르는 것이건 간에 과대평가(착각)된 능력하에 판단된 결정이 세상을 움직인다면? 예상할 수 없는 충격과 파국을 불러올 수 있지 않겠는가. 때문에 중대한 결정권을 가진 자(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인사)의 선정은 매우 심각하고도 신중해야 한다.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믿는 허위, 우리를 곤경에 빠뜨려
여기서 학위와 관련된 이런 우스개 하나를 살펴보자.
“난 무엇이든 다 안다.”(학사)
“내가 모르는 것도 많다.”(석사)
“난 아무것도 모른다.”(박사)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말하면 다들 믿는다.”(교수)
재미있는 얘기다. 신출내기일수록 자기를 과신한다. 의욕이 넘쳐서 일 수도 있지만 아직 제 분수를 모른다는 얘기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렇다.
“내가 뭘 아는지 알겠다.”(학사)
“내가 뭘 모르는지 알겠다.”(석사)
“내가 뭘 아는지 모르겠다.”(박사)
“거짓말을 해도 다들 믿는다.”(교수)
수준이 높은 고수일수록 자기 능력의 한계를 안다는 얘기가 된다.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인지 편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현상을 이른다.
미국 코넬大 사회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더닝(David Dunning)과 대학원생 저스틴 크루거(Justin Kruger)가 코넬 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를 토대로 제안한 이론이다.
특정 분야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적당히 유능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요지이다. 그들은 자동차 운전, 체스, 테니스 및 유머 감각, 문법 지식, 논리적 사고력 등의 부문으로 테스트를 했는데 점수가 낮을수록 실제 성적에 비해 피험자 당사자의 등수 기대치(자신감)가 높았고 오히려 높은 성적을 받은 피험자들은 그 반대 경향을 보였다.
시험공부를 한 번도 안 하다가 전날 밤 벼락치기로 공부하고 나서 시험을 잘 본 것처럼 느꼈다면 더닝 크루거 효과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평소 수많은 노력을 투자해 누구보다도 많은 문제를 풀고 나서 ‘다른 애들은 이거 맞췄겠지?’라고 느낀다면 이 또한 더닝 크루거 효과다. 매번 1등이면서 시험만 보면 못 본 것 같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지 않나. 그들도 더닝 크루거 효과의 영향을 받은 거다.
또한 메릴랜드 대학교 연구자 이언 앤슨(I.G.Anson)이 2018년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정치지식이 평균 이하인 응답자들은 자신의 정치 이해 수준에 과잉 확신을 갖고 있다. 이런 반응은 자신이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 쪽인지 의식할수록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정치 잘 모르는 사람일수록 ‘정치 잘 안다’ 착각”하는 이런 경향은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의 광신적인 행태를 잘 설명해준다. 자신의 정치신념에 종교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치 이해 수준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적잖이 관심을 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본디 무엇이든가. ‘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뜻이다. 그럴 것 아니겠는가. 자신이 무지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은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한다. 하지만, 자신이 무지함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안 한다. 지금 상황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하기는 공자 선생님이 그러셨다,
“아는 것을 안다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논어 위정편>
또 노자 선생님은 이렇게 짚으셨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도덕경>
선택 결과에 대한 무지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런 위대한 스승들의 말씀을 제 잘난 맛에 우쭐대는 그딴 속물 후보자들이 헤아리기나 하겠는가. 하물며 실행에 옮기기란? 이 단정에 흥분하는 후보자들이라면 단연코 속물 후보자가 되겠다. 찰스 다윈이 이런 말을 남겼다.
“무지는 지식보다 더 확신을 가지게 한다.”
세상은 그렇다. 모르는 놈이 더 설친다. 왜냐고? 제 무식을 감추려니 더 나댈 수밖에. 대학 졸업 수준 상식 가지고 대단한 지식이라도 가진 것처럼 우쭐대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본다. 남들도 다 아는 걸 마치 자기만 아는 양. 윤똑똑이들이다. 윤똑똑이 후보는 필요없다. 똑똑한 후보들이 겨뤄라. 물론 이 선택조차도 국민의 몫이다.
우리 현실은 리더의 중요성이 새삼스럽다, 메시아는 아닐지라도 혜안 있는 지도자가 중요하다. 위기에서 국가와 국민을 구하는 지도자는 오로지 국민이 선택한다. 그 때문에 국민들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현재에 대한 무지와 미래에 대한 무지는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에 대한 무지는 용서받을 수 없다.”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Arthur Schiesinger)의 말이다. 여기서 해답을 찾아 본다.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무지는 용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한 무지는 용서 받을 수 없다.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