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개혁을 두려워하는가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1-08-06     백승종 객원기자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사우, 2019)

1510년(중종 5) 11월 어느 날의 경연 풍경이 떠오른다. 그날 왕과 신하들은 『중용』 13장章의 의미를 탐구했다. 알다시피 제13장은 ‘충서忠恕의 도道’를 기록한 글이었다. 훈구대신들이 묻고 신진사류인 경연관이 답하는 방식이었다.

경연에서는 경전의 뜻만 풀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대의 현안도 함께 거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날의 경연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 현안이 논의되었으나, 조정의 실권자로서 경연에 참석한 대신 성희안의 반응이 유난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대신을 깔보는 신진사류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며 별렀다. 성희안은 ‘충서’ 가운데서도 ‘충성 충忠’이란 한 글자에 집중했다. 그 무렵 전라도 전주에서 한 지방관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서울에서 왕명을 받고 내려간 관리가 자신의 비위 사실을 적발하자 즉시 사직서를 제출하고 만 것이다.

성희안은 수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사직서를 내는 것은, 조정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판단했다. 만일 조정에 엄격한 기강이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사직서만 삐죽이 들이민 채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가라며, 성희안은 분노했다. 중종은 성희안의 뜻에 동의했다. 

“사헌부에서는 그 사람을 붙잡아서 죄를 물어야 한다. 내가 듣건대 요즘은 사직서도 내지 않은 채 관직을 물러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 경우에는 해당 지역의 관찰사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 14책, 474쪽)

신진사류들은 『중용』 제13장을 읽고 나서 성희안처럼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에게 더 철저한 자기성찰을 요구하든가 또는 신하들에게 관대하게 대하기를 주문하였다. 또는 이 구절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여, 정성(誠)스런 마음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훈구파 성희안이 대신의 권위를 강조한 것과는 차이가 뚜렷하였다. 요컨대 신진사류, 곧 넓은 의미의 ‘기묘당’은 실천주체의 도덕성에 방점을 찍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훈구파의 『중용』 해석은, 현실적 이익을 염두에 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는 항상 현실이 최우선이었다.

조정의 오랜 관습을 지키고, 기왕의 제도를 적극 옹호하면서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1507년(중종 2) 11월 15일이었다. 중종이 경복궁 사정전에서 유생들의 공부를 독려했다. 훈구파 영의정 유순은 『중용』에 나오는 구경九經을 함께 공부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구경설’은 16세기 조정의 관심이 집중된 한 구절이었다. 이 구절은 『중용』 제17장에 나오는 것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아홉 가지 법도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정전에서 중종은 우선 신하들과 함께 경전 공부를 했다. 이어서 신진사류들은 ‘구경설’과 관련이 있다며 몇 가지 국정 현안을 거론했다.

특히 두 가지 문제에 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하나는 내수사가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문제를 비판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의정부의 관리들이 직무에 태만하여 행정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고발이었다. 훈구파는 신진사류가 제기한 문제점을 조금도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영의정 유순의 대답이 압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정부 사인舍人(정4품) 등의 일은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개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종 역시 그에 동조했다. 왕은 문제점이 드러난 내수사의 고리대 문제 역시 대왕대비의 의중을 따른 것이라, 손댈 길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조선왕조실록』 14책, 203쪽).

훈구파가 조정을 지배하는 한, 경연에서 어떤 문제가 논의되더라도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그것은 오랜 전통이거나 또는 왕실의 어른이 이미 정한 것이므로, 감히 어떻게 손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득권층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항상 근본적인 개혁을 반대한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 사람은 가진 사람들이다.

※출처: 백승종,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사우, 2019; 세종 우수교양도서)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