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순신!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1-08-04     백승종 객원기자

2014년이었다. 영화 <명량>이 개봉한지 불과 5일만에 관객수 400만을 돌파했다. 우리사회에 이순신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았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주연 배우 최민식의 연기도 좋았고, 전투 장면을 담은 화면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 영화를 2014년 8월 2일 토요일에 관람했다. <명량>을 보고 나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영화의 흥행을 반대하거나 또는 인기를 질투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순신의 모습을, 나는 그 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

나의 이순신은 <명량>이 묘사하는 것과 같은 권위적인 무장의 모습이 아니다. <<난중일기>>를 읽을 때나, 이순신이 쓴 다른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시대를 고뇌하는 지칠대로 지치고, 섬약하달 수밖에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한 병약한 한 사람의 선비를 보았다. 

그에게도 때로 강철같은 결단과 불퇴전의 용기가 있었지마는 그의 본 모습은 '철의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이순신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끊임없이 회의하고 비틀거리면서도 자신이 나아갈 길을 끝내 잃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 그는 최고의 시인이었다.

물론 김한민 감독에게도 해석의 자유가 있다. 어차피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말하는 이순신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이순신이 아니다. 누구도 "역사적 사실"을 가질 수 없다.

'사실'은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명료하게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파악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인식이 되고 만다. 해석과 사실의 관계는 선후의 문제도 아니며, 더구나 객관과 주관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를 말함은 결국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 관점을 달리하는 사람마다 역사적 사실은 다른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나의 이순신은 나만의 인식일는지도 모른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은 법이라 한다.

이순신이라는 역사의 거인은 그 그림자 또한 유별나게 길다. 그림자를 걷어내고 그의 본모습에 다가서는 것,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진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맥박과 심장의 박동을 느끼려 노력하는 것,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실패가 예정된 것이 바로 역사적 탐구다. 아니, 모든 종류의 지적 탐색이 다 그와 같다고 여긴다.

사족: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의 함정입니다. 경험 자체는 '사실'일지 몰라도, 경험을 복기하는 우리의 행위는 하나의 '인식'작용이고, 그것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날 한시에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의 생각은 달라도 아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시민의 그늘진 삶을 떠올리면서 누군가는 좀 더 많은 복지와 안전망을 생각합니다. 고상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요.

그들을 위해서 위생 검사의 문턱을 낮추고, 위험하더라도 더욱더 싼 음식을 많이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치하고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시장, 도지사가 되면 더욱더 많은, 가난한 시민이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릴 것입니다.

인식의 차이는 존중되어야하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분명히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사실의 해석은 자유이나, 모든 해석에는 윤리적 또는 정치적 책임이 따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순신을 어떻게 보느냐, 우리의 공동기억인 역사를 어느 관점에서 해석하느냐도 결국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사실이, 결코 아무렇게나 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제가 "뉴라이트"의 철없고, 위태로운 해석에 강력히 반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마음으로 신중하게 헤아려야 할 '선'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생각하며, '호리지차'(털끝만큼의 차이)를 생각하느라 서로 원수가 되고 말았던 옛 선비들을 생각합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