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행적' 빠진 인촌 김성수 동상, '치적' 뿐

[기획 특집] 미완의 친일 청산(29)

2021-08-01     박주현 기자

고창군은 친일 인물인 미당 서정주와  인촌 김성수, 수당 김연수가 태어난 곳이다. 이 때문에 이들의 생가와 문학관, 송덕비 등 친일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 

고창지역 친일 잔재 두 번째 편으로 인촌 김성수 동상 외에 식민지 지주의 소작인 착취 잔재로 유명한 홍해농장 일꾼 숙소, 홍해농장 일본인 가옥터 및 돌계단, 구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 등을 차례로 소개한다. 

인촌 김성수 동상

고창군 고창읍 석교리 7-1 새마을공원 내

인촌 김성수를 기리는 동상은 고창군 새마을 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1983년 고창군민의 성금으로 만든 동상으로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부분은 적혀있지 않고 그의 행적을 치적하고 있다. 

인촌 김성수는 일제 강점기 경성방직 사장이자 동아일보 사장, 보성전문학교 교장,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및 평의원을 역임했다. 1940년대에는 학도지원병을 독려하고 징병제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며 매일신보를 통해 다양한 출병 장려 글을 기고했다. 또한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축사를 했다. 

그러나 뒤늦은 2017년 4월 13일 대법원 최종 판결에 의해 친일 행위자로 최종 판정된 김성수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서훈이 박탈되고 현충시설로 지정됐던 고창군 부안면 생가와 새마을공원 내 위치한 동상도 현충시설 지정에서 해제됐다. 

수당 김연수는 인촌과 형제로 경성방직 사장이자 삼양사 사장이며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기업 활동을 하며 일제에게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각종 단체와 이름으로 군자금을 수십 차례 지원했으며 형과 마찬가지로 1940년대에는 학도지원병 독려 및 징병제 참여를 종용했다. 친일 행적을 적지 않았으므로 친일 잔재로 선정된 사례다. 

홍해농장 일꾼 숙소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195-1(복분자로821-17) 

홍해농장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머문 숙소다. 현재는 방치되어있다. 마스토미 야스자 에몬(枡富  左衛門)은 1880년 후쿠오카 현(福岡縣) 모지(門司) 출신으로 1904년 고수익 확보가 가능한 한국에서의 농장 경영을 계획하고 러·일전쟁 당시 병참 부문에서 활동하며 전라북도 일대 옥답을 확인하며 농장 경영에 착수했다. 

지역에서 오산교회, 오산학교를 세우는 등 조선인의 교육 증진과 계몽에 힘쓴 인물로 보이지만 세간의 평가와 달리 그는 식민지 지주로서 소작인을 착취했다. 

홍종철은 고창군 아산면 출신으로 1890년에 태어났다. 마스토미의 양자가 된 그는 마스토미의 재산을 모두 물려 받는다. 1916년에 전북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토지조사 사업에 협조했으며, 1920년 동아일보 설립 발기인, 1924년 전북도평의회원, 1930년 조선통독부 중추원참의를 했다. 

말년에 본래 가옥은 화재로 전소하여 홍해농장 내 일꾼 숙소였던 곳에서 살다 죽었다. 식민지주의 농장으로 수탈의 현장이기에 친일 잔재로 선정된 곳이다. 

홍해농장 일본인 가옥터 및 돌계단 

                           홍해농장 가옥터 :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195-3(복분자로 82-31)

 

                          홍해농장 돌계단 :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195-3(복분자로 821-31)

홍해농장 가옥터 및 돌계단은 마스토미 야스자에몬과 홍종철이 머물던 가옥의 흔적이다. 홍해농장은 마스토미에게 물려 받은 마스토미 농장을 홍종철이 1924년부터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식민지주의 농장으로 수탈의 현장이기에 역사적 보존 가치가 크다.   

구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 246 고창고등학교(모양성로 50)

구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은 1938년 세워졌다.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전신인 오산보통학교를 마스토미가 경영 문제로 폐쇄하려 하자 고창군민들이 기금을 모아 고창고등보통학교를 만들었다.

이후 항일, 반일 문제로 제적된 학생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다 1938년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강당을 지었다. 마스도미 야스자 에몬(枡富 左衛門)은 1880년 후쿠오카 현(福岡縣) 모지(門司) 출신으로 1904년 고수익 확보가 가능한 한국에서의 농장 경영을 계획하고 러·일전쟁 당시 병참 부문에서 활동하며 전라북도 일대 옥답을 확인하며 농장 경영에 착수했다. 

오산교회를 세우고 오산학교를 세우는 등 조선인의 교육증진과 계몽에 힘쓴 인물로 보이지만 세간의 평가와 달리 그는 식민지 지주로서 소작인을 착취했다.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은 마스토미에서 지역 주민들로 학교의 주인이 옮겨진 역사의 한 일부분이다.  

※참고 자료 :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2020.12)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