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북극성 품어야 '코로나 지옥' 탈출
[만언각비]
이런 말이 있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예술이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다.”
그런 이치에 합당한 말은 어디까지나 세상이 평화롭고 태평할 때 얘기다. 가정과 사회가 화평하고 인심이 따뜻한 그런 시절에 논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천하가 온통 코로나 괴질에 고통받고 인심이 뒤숭숭하다. 많은 애꿎은 목숨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뭇 시민들이 병에 걸려 괴로워하고, 급기야 견디다 못한 이들이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온 국민이 극심한 아노미에 빠져 있는 지금,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의 풀이를 빌려온다면 응당 과학적인 태도와 판단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 코로나를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때론 종교의 힘도 필요하다. 마치 눈부신 태양을 보려면 맑고 깨끗한 유리가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검은 재(그을음)가 묻은 탁한 유리로 봐야 하듯이 말이다. 물론 종교의 영역에서도 분명 지금은 인내와 마음의 평화를 가르치고 있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의 뜻(志) 유념해야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을 되새겨보자. 순자(荀子)의 유좌편(宥坐篇)에 나오는 얘기다. 공자께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살펴보고 있는데 자공이 물었다.
“군자는 큰 물을 보면 반드시 살펴야 한다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말씀하시길,
“대저 물은 뭇 생명과 함께 하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는 덕(德)과 비슷하다. 그리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옷깃을 여미고 이치에 따른다. 이는 의(義)와 비슷하다. 또한 콸콸 흐르며 다함이 없다. 이는 도(道)와 비슷하다.
결행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듯 내달리매 소리를 내고 수백 길 계곡을 흐름에 두려움이 없다. 이는 용(勇)과 비슷하다. 헤아림에 있어서는 공평하니 이는 법(法)과 같고, 그릇에 가득 차도 평미레질을 하지 않으니 이는 정(正)과 같다.
부드럽고 은근하게 도달하니, 이는 찰(察)과 같다. 밖으로 나감으로써 안으로 들어오고, 앞으로 나아가매 깨끗해지니, 이는 선화(善化)와 같다. 수만 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니, 이는 지(志)와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큰 물을 보면 반드시 살펴야 하는 것이다.”
물의 여러 덕목을 비유한 말이지만 무엇보다 뜻(志)이 중함을 가리킨다. 공자께서 공연히 물에 빗대 의지(志)의 중요함을 제자에게 가르쳤겠는가. 그만큼 요긴한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오랜 옛날 아직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 사람들이 바다를 항해할 때에는 별자리를 관찰해 방향을 정했다. 북반구 바다를 헤쳐나가다 길을 잃을 때에는 북극성(Polaris)이 길잡이별이 됐다. 남반구에서는 북극성 대신 남십자성(Crux)이 역할을 했다. 나침반이 발명되고 나서는 나침반이 길잡이별 역할을 대체했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성항법장치)가 그 바톤을 이어받게 되었지만. 길잡이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
링반데룽(ringwanderung)이라는 등산용어를 들어봤으리라. 링이란 말 그대로 ‘고리 혹은 둥근 원’을 말하는 것이고 반데룽은 ‘걷는 것 혹은 방랑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 두 낱말을 조합한 게 링반데룽이다. 등산 도중 악천후로 인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 장소를 반복해서 맴도는 것을 일컫는다. 우리말로는 환상방황(環狀彷徨)이라고도 한다.
또한 극지방이나 겨울철에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면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고 원근감이 없어져서 사람이 행동을 하는데 제약을 받게 된다. 이른바 화이트아웃(whiteout) 현상이다. 이러한 화이트아웃이 발생하면 지평선이 사라지고 기준점(reference points)을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화이트 아웃 현상이 생기면 무리하게 이동하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시야가 회복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링반데룽· 화이트아웃에서 헤쳐나오려면 기다림이 필수
그런데 이러한 화이트아웃이나 링반데룽은 비단 극지방의 사람이나 악천후를 뚫고 등산을 하는 전문 등산가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빈번히 부딪칠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시야가 툭 틔어서 아무런 애로 없이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떤 때는 그야말로 안개가 자욱하거나 화이트아웃이 발생하여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맴돌며 고군분투하는 경우도 많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나라가 코로나로 인해 링반데룽이나 화이트아웃에 빠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대처방법은 마치 자연에서 화이트아웃이 발생할 때나 마찬가지다. 무리하게 이동하려고 애쓰지 말고 시야가 회복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리듯 해야 한다. 인생에서의 화이트 아웃현상이 발생할 때도 일단은 모든 집착과 고민을 접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쉬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납작 엎드려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곰이 굴속에서 동면하듯 한동안 모든 것을 잊고 칩거하면서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좋으리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괜히 무리하게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나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숨죽여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처신에서도 그렇듯 코로나 대처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효과적일 듯 싶다. 그렇다고 아무 대책 없이 손놓고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방역 당국의 조치와 권고를 따르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대처법이지 않은가.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하듯 어쩌면 오랫동안 침잠해 있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리하여 도저히 더이상은 견딜 수가 없을 때, 혹은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까지 다다랐을 때 비로소 바닥을 박차고 올라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 개인의 삶은 100미터 달리기와 같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오히려 마라톤 경기나 혹은 장거리의 수영, 마라톤, 사이클을 결합한 철인 3종 경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빨리 모든 것을 이뤄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인생은 결코 짧지 않으며, 비록 지금 에둘러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길이 나중에 뒤돌아보면 지름길이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코로나를 이겨내는 방법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의 코로나 난국이 하루 아침에 두부모 자르듯 일거에 해결될 국면은 아니기에 말이다. 그러니 길게 보고 인내를 하며 이겨내야 한다.
어둠속 목적지에 이르려면 북극성 있어야
그럼에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믿음이 있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과 그 길을 비춰주는 북극성이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지가 없고 따라서 북극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가. 한 번 넘어지면 굳이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길을 나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주저앉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급선무는 명쾌하게 드러난다. 바로 자신의 목적지를 결정하고 그 길을 가리켜주는 길잡이로서의 북극성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거다.
마음속에 북극성을 간직한 사람은 어떤가. 비록 순간순간은 아무리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 지향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목적장소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자님이 “수만 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니, 이는 지(志)와 같다(其萬折也必東, 似志)”라고 말한 이유다. 여기서 지(志)란 바로 ‘의지’를 말한다. 황하가 비록 지금은 굽이굽이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동해(우리에게는 서해이지만 중국 쪽에서 보면 동해)에 다다르고 말리라는 강한 의지 바로 그것이다.
맹자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심하다(弗思甚也)’고 생각없이 사는 인간을 걱정했다. 일에 바빠 정신없이 사는 것을 대개는 자랑으로 여기지만 그렇지가 않다. 자신을 추스르고 돌이켜볼 줄 알아야 한다. 애신(愛身)하라 했다. 나를 소중한 존재로 만들라는 가르침이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막무가내로 날뛸 게 아니라 방역기관의 지침에 차분히 따르는 일이겠다.
이런 답답하고 막막한 시국에는 불현듯 잔 다르크가 떠오른다. 잔 다르크는 문맹이었으나 똑똑했다. 그러나 마녀사냥의 제물이 됐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신과 직접 소통했다는 게 죄였다.
재판관들은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신의 은총을 받았는가?”라고 물었다. “예” “아니오” 모두가 그녀를 단죄할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잔 다르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받지 않았으면 은총을 받기 바라며, 받았으면 신께서 은총을 유지해주기 바란다.”
신학자들은 그의 총명함에 경악했다. 우리는 잔 다르크의 총명과 슬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믿음이나 종교도 마찬가지다. 함정에 빠지지 않는 총기와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암담한 시기에 역병을 물리칠 ‘잔 다르크’의 화신이라도 나타나 줬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 화신이 “신의 은총을 받지 않았다면 받기 바라며, 받았다면 신께서 은총을 유지해줘 코로나19 역질을 물리치게 해주시라”고 간구해달라고.
현 정부와 방역당국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굳게 믿는다. 그저 지금의 ‘코로나 지옥’이 아득하고 숨이 막힐 듯해서 단말마의 비명이라도 내지르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해보는 푸념이다. 참으로 어수선한 시국에 답답한 세상이다. 하지만 예서 거꾸러질 수는 없다. 극한의 참을성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서는 마치 마라토너나 철인3종 선수처럼 참고 견디는 길밖에 없는 듯싶다.
기자도 더 이상의 말씀을 드릴 게 없을만큼 무안하고 무망하고 무렴하다. 극한의 이 재앙 때문이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그저 이유없이 죄스럽다. 한없이 아득하고 막막하다. 이 역병의 시기, 끝이 보이지 않는 무망의 시대, 언제 그 끝이 오기는 오려나.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 마음속에는 과연 어떤 별이 반짝이고 있는지 한번 되짚어 봐야 하겠다. 과연 북극성은 빛나고 있는지…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