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비엔나가 한없이 부러운 이유
백승종의 '역사칼럼'
비엔나는 삶의 질이 대단히 높다. 통계조사 결과 세계인이 가장 선호하는 최상의 문화도시로 평가되었다. 2018년 3월 미국의 컨설팅 회사 머서(MERCER)가 발표한 순위에 따르면, 비엔나는 9년 연속으로 1위를 지켰다.
2위는 스위스의 취리히였고, 서울은 유감스럽게도 79위였다. 다 아는 대로 비엔나는 이곳의 영어식 이름이다. 독일어로는 비인(Wien)이라 부른다. 그 인구는 150만 명에 불과하다.
한국의 대도시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이렇다 할 대도시가 아닌 셈이다. 하지만 비엔나는 더할 수 없이 국제적이다. 과장이 아니라 관광객의 행렬이 끝도 없다.
또한, 각종 국제회의가 무척 빈번하다. 잠시 통계를 곁눈질해 보았다. 2014년 한 해만도 이곳에서 202번의 대규모 국제 행사가 개최되었다. 비엔나의 역사에도 물론 내리막길은 있었다.
이 도시도 한때는 깊은 위기에 빠져 허우적댔다. 오스트리아 출신 아돌프 히틀러가 일으킨 문제였다. 1938년, 독재자 히틀러는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독일 제국에 편입하였다.
그 바람에 오스트리아는 전범국가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주권을 잃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지혜로웠다. 그들은 신중한 고려 끝에 중립을 선포했다.
장차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속하지도 않겠고, 소련 중심의 동구권에 가입하지도 않기로 맹세했다. 좌파도 우파도 똑같은 의견으로, 조국의 분할을 맹렬히 반대했다!
그들의 애국심은 하나의 국제적 약속이 되어, 오스트리아는 연합국에 점령된지 10년 만에 드디어 주권을 되찾았다. 1945년 해방 뒤에 겪은 한반도의 혼란과 비극을 생각하면, 오스트리아의 결정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그후 유서 깊은 문화도시 비엔나는 그 약속대로 세상의 조류가 아무리 바뀌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국제사회는 그에 대해 보상을 해주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비엔나에 본부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엔 마약범죄사무국, 석유수출국기구, 유럽 안보협력기구 등도 하나둘씩 이 도시에 둥지를 틀었다.
오스트리아가 국제 무대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정말 부러운 일이다. 우리나라도 장차 이처럼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출처: 백승종, <<도시로 보는 유럽사>>(사우, 2020)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