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9)
불안하게 맞은 해방...식민지 제도 그대로 답습
1945년 8월 15일. 중대 뉴스 발표 예고에 식민지 백성들은 숨죽이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심한 잡음과 함께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 그것은 뜻밖에도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었다.
치욕의 식민치하에서 사무치도록 그리던 광복은 머리가 띵할 정도로 갑자기 찾아왔다.
‘광복(光復)’은 글자 그대로 ‘빛을 되찾는다’는 뜻으로 ‘새 출발’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항(1899년) 이후 일제가 근대화시킨 군산도 ‘수탈의 도시’란 치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그러나 거리에서 감격의 만세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군대(수호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해방정국의 군산 사회가 다른 도시보다 불안정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944년 5월 당시 군산(옥구군 포함)에는 지역 경제력을 장악하고 주인 노릇을 하는 일본인이 3,000여 가구에 1만 1,100여 명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가구 수와 비슷한 적산가옥의 소유, 입주, 매각 문제 등으로 갈등이 증폭됐기 때문이었다. 일본인을 대신해 행정을 처리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9월 8일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군정(軍政)을 실시한다는 미군사령부 명령 제1호를 선포한다. 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자생적인 국내 치안 조직도 해산시키고, 일제 식민 통치기구를 대부분 계승하였다. 특히 독립지사들을 고문하고 압박했던 경찰들의 복귀는 많은 사람의 우려를 자아냈다.
행정은 일제 강점기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으며, 치안도 일본식 경찰 기구를 활용하였다. 이처럼 관리 구조는 대부분 식민지 관치주의적 특성을 유지한 채 미군정 시기까지 이어졌다.
해방정국에서 혼란이 진정될 때까지는 일본 관료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미군사령부 하지 중장은 일본인 관리들을 행정 요직에 남아 있게 하였다. 군산도 미군이 들어와 행정기관을 접수하여 기구를 개편할 때까지 일본인 관리들이 완장을 두르고 자리를 지켰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한국인의 불만이 높아지자 미군정은 한국인을 등용하기 시작한다.
군산은 10월 5일 군정이 시작된다. 초대 군정관은 마우츠 소령이었다. 그는 일본인 관리 잔류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자 조선인 부윤(시장)을 물색한다. 당시 강력한 행정조직이었던 동장 연합회에서 김용철(金容喆)을 추천하고, 마우츠 군정관은 도의 승인을 받아 임명한다. 김용철은 충남 서천 출신으로 1년 6개월 동안 군산 부윤을 지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광복. 혼란스런 격변기임에도 군산은 체육의 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다. 그해(1945) 가을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제26회 전국체육대회)’에 야구, 축구, 육상, 농구 남자 일반부가 전라북도 명예를 걸고 출전한 것. 이후 군산의 체육은 각종 전국규모 대회에 참가하는 등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였다.
광복 후 ‘체육의 도시’로 거듭나
광복 후 군산은 ‘체육의 도시’가 된다. 해방정국의 격변기에도 각 체육 분야 선수들이 전국규모 대회에 출전하여 군산의 혼을 심는다. 1920년대에 시작된 시민체육대회는 한국전쟁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1948년 호남도시대항 및 중등야구쟁패전, 1953년 전국축구대회 등 각종 대회가 개최되고, ‘체육인의 밤’ 등 다양한 체육행사가 해마다 열린다.
1946년 3월 서울에 조선연무관(지금의 한국체육관)이 창설되고, 군산 영화동에 종합체육관(군산체육관)이 개관하면서 체육 발전의 토대가 잡히기 시작한다. 태권도, 유도, 역도, 권투부 등이 들어선 군산체육관은 일제강점기 2층 높이의 쌀창고를 개조한 붉은 벽돌 건물로 국내외에 이름을 떨친 스타급 선수와 지도자를 배출하는 등 지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일제의 압력으로 해산됐던 체육 단체들이 재조직되면서 크고 작은 각종 대회와 친선경기가 개최된다. 일제36년 동안 항일항쟁의 또다른 수단으로 인식됐던 운동경기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시민들은 스포츠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
1949년 3월 군산체육회는 배달성냥회사(배달산업주식회사)와 공동으로 군산 동(東)·중(中)·서(西) 3부 대항 축구대회를 개최한다. 같은 해 5월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직장대항 축구대회는 마루보시(조선운송주식회사) 군산지점, 남선전기(한국전력) 군산지점, 어업조합, 북선제지주식회사, 자동차협회, 배달성냥회사 등 13개 팀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으며 배달성냥회사 팀이 우승하였다.
1955년 가을(10월 29일~30일)에는 군산체육회가 주최하는 ‘호남 3개 도시대항 야구대회’가 금암동에 있는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수많은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전, 전주, 군산 등 3개 도시팀이 출전하여 이틀 동안 격전을 펼친 결과 우승컵은 2전 전승한 대전팀에게 돌아갔다.
군산체육회는 야구, 축구, 농구, 배구, 권투, 배드민턴 등 다양한 종목에서 국가대표 선수를 길러냈고, 전북의 체육을 이끌었다. 또한, 신일선 초대 회장이 취임하는 1945년부터 20대 박원삼 회장이 임기를 마치는 1980년 8월까지 어려운 시기에 향토기업인들의 경제적 지원과 원로 체육인들의 헌신적인 지도는 체육회 발전에 버팀목이 돼주었다. (21대부터 군산 시장이 당연직 회장이 되었음)
1974년 2월에는 ‘군산시체육회’로 명칭을 변경한다. 그 후 체육 인프라 확충, 인재 발굴∙육성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또한, 1989년 발족한 ‘군산시생활체육회’와 통합 절차가 마무리되어 2012년 4월 13일 군산시청 4층 상황실에서 통합체육회 창립 이사회를 열고 ‘군산시민체육회’ 출범을 선언한다. 동년 7월 31일에는 새 사무실에서 통합 후 첫 이사회를 개최하고 현판식을 가졌다.
군산은 1960년 이후 추진된 개발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한때는 ‘불 꺼진 항구’, ‘시간이 멈춘 도시’ 등의 오명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체육은 꾸준히 성장하여 수많은 스포츠 스타를 길러냈고,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공헌하였다. 88서울올림픽에서는 군산 출신 김광선 선수가 복싱(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하였다.
군산의 체육은 시민의 정성과 선수들의 투혼으로 발전하고 성장하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팀들이 속속 창단됐고, 선수들은 올림픽에 출전하여 국위를 선양했다. 그 과정에서 시민의 화합과 단결은 물론 경제에도 적잖은 도움을 줬으며, 군산의 혼을 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군산상고 야구(역전의 명수)는 창단 반세기 가까이 지났음에도 군산의 아이콘이 되었다. (계속)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