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거짓을 이기는가

만언각비

2021-06-26     이강록 기자

거짓말의 부피가 하늘을 덮는다/……/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고 내가 내 말을 안 믿는다//나는 아무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 이 죄에는 사과의 길이 없다 봄이 오고/ 쥐가 나돌고 풀이 솟는다 소리 없이 소리 없이// 나는 한 가지를 안 속이려고 모든 것을 속였다/이 죄의 여운에는 사과의 길이 없다 불란서에 가더라도/ 금방 자유가 온다 해도(김수영 ‘거짓말의 여운 속에서’ 일부)

자유를 노래했던 김수영은 ‘나는 아무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고 걱정했다. 공연한 걱정이었을까. 박정희 독재정권 아래서 자유를 위해 떳떳하게 자신의 정치 의견을 말하지 못한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며 한 말이었다.

하늘이 부끄러워 눈을 가리고 변소에 가며 거짓말의 부피가 하늘을 덮는다고,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 자신 또한 믿지 않는다고 자책했지만 현실은 메마르고 강퍅하기만 했다.

얼마 전 16일이 김수영 시인이 세상을 하직한 날이다. 그가 이 세상을 버린 지 벌써 53년이나 흘렀다. 하여 거짓말이 난무하는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 걱정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책 표지(일상이상 출판)

너도나도 걱정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위기에 빠져 있다고. 아니게 아니라 위기가 아니라고 진단하는 맹문이는 없다. 코로나19까지 겹쳐 나라가 온통 파국 직전이다. 과거에도 늘 위기나 난국은 있었다.

하지만 ‘함께’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절망이 앙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 절망감은 서서히 퍼져가는 게 아니다.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확산돼 온 나라를 무섭도록 휘감고 있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민생들의 가장 화급한 과제인 경제마저 극도의 침체와 함몰 속에서 헤어 나올 줄을 모르는 판국이다.

어느 한 구석조차 희망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날 우리 사회의 장점이자 에너지원이었던 ‘활력’과 ‘신명’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어찌하여 이렇게 됐을까?

이처럼 우리 사회가 전방위적 위기에 빠진 데는 응당 원인이 있을 것 아닌가.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뭐라 해도 참다운 소통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권자와 피선거권자, 국민과 정치인, 주민과 주민대표 사이에 소통이 막혀있다.

그 원인 가운데 주요한 것이 바로 정직한 교감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입에 발린 약속의 남발, 득표를 노린 선심성 공약, 자기과시용 정책 수립 등등. 그러니 진솔하고 감추는 게 없이 생각과 비판을 주고받는 관계, 그리하여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럴 땐 노자(老子)의 가르침이 사무치게 그립다.

“큰 나라는 큰 인물과 같다. 큰 인물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깨닫는다. 깨달으면 인정한다. 인정하면 바로잡는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을 가장 고마운 스승으로 여긴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위대한 가르침을 한 순간이나마 마음에 품으려 했던 지도자나 정치인이 있기는 있는가.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나마 위안 삼을 만하지만 어쩐지 심드렁할 따름이다.

그런데 또 정치(선거)의 계절이 다가오자 너니나니 할 것 없이 설쳐댄다. 자신을 알리고 경쟁자와 견주는 과정에 진실만 있다면야 누가 뭐랄까만. 갖은 사술과 거짓이 난무한다.

더구나 위기에 부딪혀서도 이를 타개할만한 경륜과 지혜를 갖춘 눈 밝은 이는 쉽사리 찾기가 어렵다. 기껏해야 알량한 경험과 좁은 통찰력이 밑천의 전부인 그런 옹망추니들이 나서 목청을 돋운다. 그런 자들이 아무리 자기 목청을 돋운들 유권자들에게 절절하게 들릴 리 만무하다.

국가 전체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정파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자를 두고는 정치지도자라기보다는 조직의 보스이거나 아예 골목대장이라 칭해야 마땅하다. 현실은 어떤가.

그런 아류들이 자기 정파의 이익을 국가 이익이나 되는 양 과대 포장해 사회를 갈가리 찢어놓고는 그것을 정치라고 강변해댄다. 오늘날 어느 국민이 그런 뻔한 셈속을 모른단 말인가. 국민을 얕잡아 봐도 한참 우습게 봤다. 그러니 세상은 온통 절망과 한숨으로 넘쳐난다.

인두겁 쓴 슈도(pseudo)언론 음모·술수 전파하는 악마

이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에 불신과 그에 따른 자포자기와 증오로 가득하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소통 위기의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그 원인제공은 물론 어설픈 정부와 그 편승자들, 그걸 빌미삼아 악다구니 써대는 정치모리배들이 가장 크게 해왔다. 거기에 한술 더 뜬 세력이 있다. 오늘날 그악하게 ‘페이크(가짜) 뉴스’를 마구 날조해대는 ‘슈도(pseudo) 언론’들이다.

그들은 인두겁을 쓴 가짜다. 진실을 전달하기는커녕 거짓 나아가서는 음모와 술수를 조작해 전파하는 악마임에 분명하다. 내 이익을 위해서는 상대를 파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그러니 단지 거짓의 전파로 끝나지 않는다. 숱한 의혹과 조바심, 나아가서는 불신과 혐오를 창궐시킨다. 그래서 악마다.

거짓말 경연대회가 열렸다. 상금이 푸짐하게 걸렸는지라 많은 사람이 출전했다. 어떤 연사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글쎄 나는 큰 바위가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두부를 먹다가 이가 부러져서 치과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연사가 무대에 올라갔다. “이래 보여도 나는 정말 정직한 사람입니다. 내 평생에 거짓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내 장모가 남에게 사기를 당한 적은 있어도 10원 한 장 피해준 적이 없다”고 한 윤석열 전 총장의 발언이 오버랩된다.)

듣고 있던 심사위원들은 감탄했다. 그리고 그를 1등으로 결정했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거짓말 속에 살고 있다. 모르고도 속고 알고도 속는다. 정치적 사술이나 협잡이 전자의 예라면 광고나 홍보 등이 후자의 예에 속한다.

그렇지만 현실이 우리를 고달프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가짜 언론에 ‘덩달이’가 돼서는 안될 일이다.

사회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대퇴행적 파도가 넘실대지만 이를 미래로 되돌리려는 정치지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 땅을 낙담과 실의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수저론’이 때아니게 만연하는가.

분명 대한민국의 헌법 제11조를 보면 국민 모두가 신분상 평등한 나라다. ①항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또렷하게 명시돼 있다. 국민의 신분상 고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21세기판 신분제 사회로 층하가 구분된단 말인가. 게다가 얼마나 감내하기 힘들었으면 현 사회를 지옥에다 빗대 ‘헬조선’이란 말까지 횡행하기에 이르렀는지 말문이 막힌다. 한국이 아닌 조선으로 빗댄 것은 신분제사회가 고착화돼가기 때문 아니겠는가. 모두 법 앞의 평등과 현실 속의 위상을 혼동한 탓이겠지만 말이다.

맥아더도 하는 거짓말

훗날 미국 군의 원수가 된 맥아더가 육군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때의 일이다. 하루는 국방위원들이 시찰을 나왔다. 맥아더는 각종 보고를 마치고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는 아무런 가구도 없고 단지 야전용 쇠침대 하나만이 놓여있었다.

“여기가 제가 생활하는 방입니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주일에만 집으로 갑니다.”

맥아더는 내심 자기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가를 말하려고 목에 힘을 주며 쇠침대에서 자는 것을 강조했다. 시찰이 끝난 후 만찬이 베풀어졌고 금 접시에 멋진 요리들이 담겨 나왔다.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모두 돌아간 뒤에 금접시 하나가 없어졌다. 맥아더는 괘씸하게 생각하고서 범인을 잡으리라 마음먹었다. 먼저 국방위원들을 의심한 맥아더는 서신을 보내 금접시의 행방을 캐물었다. 그런데 며칠 뒤 다음과 같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만일 장군님께서 그날 밤 야전용 쇠 침대에서 주무셨다면 벌써 금 접시를 찾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모포 밑에 접시를 넣어두었거든요.”

점잖은 체면에 톡톡히 망신만 당한 맥아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짓말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일이 엉망으로 틀어졌을 때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칭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큰 실수를 저질러놓고도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 까닭은? 누가 옳으냐를 놓고 옥신각신 싸움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남들의 위선은 보면서도 자신의 거짓은 보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는 모두가 거짓말쟁이인가. 아니면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정말로 믿는 걸까.

자기 거짓말을 진실로 믿은 무솔리니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자신의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게 됐다면? 이를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불쌍히 여겨,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무솔리니 생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보면 자신의 거짓말에 스스로 속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1938년 이탈리아는 3개 연대로 구성된 1개 사단을 2개 연대로 축소 편성했다. 무솔리니는 이렇게 함으로써 파시스트당이 실제 40개 사단보다 많은 60개 사단을 가졌다고 과대 선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됐을 때 이 조직개편은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자신의 결정을 까맣게 잊은 무솔리니가 실제 파시스트당의 병력을 오판했던 결과, 비극을 불러왔다.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도 저 죽을 날은 몰랐다. 이 말처럼 천하태평인 배짱을 가진 이들이 우리네 정치꾼들이다. 어제도 배부르게 떵떵거리며 권세를 누렸고 오늘도 여봐란듯이 호령하며 거들먹거린다. 이 권능과 호사를 누가 당하랴. 하여 자신만은 어떤 난국이 닥쳐도 고통에서 끝내 자유로울 것이라 착각한다. 이런 반푼이 정치인들이 이 나라 정치를 떠맡고 있는 한 현단계에서 위기극복의 실마리는 풀기 어렵다.

권력은 양심에 코팅제처럼 작용한다. 지배적 위치에 있으면 거짓말을 더 쉽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죄책감이나 후회도 전혀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질문의 오류’를 알아채야

1980년 프랑스의 그래노블에 있는 수학연구소에서 15개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각각 출제했다.

“배 위에는 스물여섯 마리의 양들과 열 마리의 염소들이 있다. 선장의 나이는 몇 살일까?”

“한 반에 열두 명의 여학생과 열세 명의 남학생이 있다. 선생님의 나이는 몇 살일까?"

출제자의 의도는 분명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질문의 부조리함을 곧바로 알아챈 후 출제된 문제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해 달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응은 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초등학교 학생들 중에서 겨우 10%만이 해답이 있을 수 없다는 정답을 적었고 나머지 90%는 해답으로 두 숫자를 합쳐 놓았다. 중학교의 경우는 3분의 1이 초등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틀린 답을 정답으로 제시했다.

이와 같은 예가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위와 같이 명백하게 부조리한 문제는 정답이 있으므로 틀린 답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마련이다. 인간의 지혜가 문제 있는 질문임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분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나 설명이 교묘히 위장되거나 거짓으로 포장될 경우 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게다가 거짓말의 파급효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 커질수록 오히려 그것은 사실로 믿으려 하는 속성이 작용하게 된다.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위대한 정치가나 통치자가 된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증명된다.

“마가복음 17장을 읽어오시오”

한 주일학교 성인반 교사가 성경공부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에는 아주 중요한 교훈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그러니 예습하는 차원에서 마가복음 17장을 모두 읽어 오세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다음 주가 되자 교사는 성경공부 참석자들에게 “지난주에 마가복음 17장을 읽으신 분 손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라고 요구했다. 그 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거참! 재미있군요. 마가복음은 16장까지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적절한 교훈을 배우게 되겠군요. 오늘은 예수님이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배우겠습니다.”

거짓말에 대한 가장 엄한 형벌은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되는 ‘숨겨진’ 처벌이 가장 무서운 벌이다. 거짓말에는 숨겨진 처벌이 뒤따른다. 거짓말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자기 양심이 자신에게 캐묻는 책임은 면할 길 없다.

게다가 사회적으로도 도덕적 처벌은 피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거짓을 감추고 죽을 때까지 갖고 가는 사람은 예외의 경우다. 하물며 철면피를 두르고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뭐 어쩔 거냐’하는 ‘두억시니 전두환’같은 이는 어찌해야 하는가. 아서라 마러라. ‘27만원짜리 가련한 인생’이니 그냥 두어야 할까.

탈무드가 권하는 거짓말

어떤 경우라면 거짓말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탈무드에서 두 가지 경우에는 거짓말을 하라고 한다. 먼저 이미 벌써 누군가가 사 버린 물건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여 왔을 때다. 설령 그것이 나빠도 아주 훌륭한 선택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한다.

다음으로 친구가 결혼했을 때에는 반드시 부인이 대단한 미인이라고 하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 미상불 모두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처럼 행복한 결말을 위해서는 하얀 거짓말, 또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라는 가르침이겠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네가 거짓말하니 나도 거짓말로 응수한다. 우리 사회가 거짓이 자연스럽고 오히려 정직이 어색한, ‘이상한 사회’가 돼가고 있다. 거짓이 만연해서 판단 감각이 무뎌진 탓이다. 이 거짓말의 사회를 끝내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거짓은 진실 앞에 반드시 무릎 꿇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진실일까. 검증된 바 없거나 결론이 난 바 없다. 그저 ‘희망 섞인 거짓말’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그 ‘희망 섞인 거짓말’을 정말 그럴 거라고 믿어줘야 할까. 그러면 진정 ‘거짓말의 사회’는 끝장이 날까?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