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야구 100년사'(17)
동경 유학생 야구단 모국 방문 경기 군산에서 개최
군산은 1899년 5월 개항하였다. 그해 인구는 588명(조선인 511명, 일본인 77명). 1928년에는 2만4858명(조선인 1만 6,075명, 일본인 8,245명, 외국인 549명)으로 40배 이상 증가한다.
1920년 ‘산미증식 계획’ 발표와 함께 쌀의 도시가 되면서 ‘호남의 웅도’로 발돋움한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더욱 가혹해지고 조선인 노동자와 소작농들의 항쟁도 뒤따른다.
일제의 촘촘한 감시망 속에서도 다양한 경기가 펼쳐진다. 1928년 6월에는 군산체육협회가 주최하고 오사카 아사히신문 군산지국이 후원하는 호남야구대회(16일~17일)가 군산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대전, 이리(익산), 전주, 광주, 군산 등 다섯 개 도시 대표팀이 참가하였다.
선수들은 첫날부터 열띤 응원전과 함께 예선전을 치른 후 대전팀과 군산팀이 최종 결승에 진출하였다. 결승전에서 만난 두 팀은 온갖 묘기와 백열적(白熱的)인 대결로 관중을 열광시키며 군산팀이 6-3으로 쾌승, 택촌(澤村) 군산 부윤으로부터 상장과 우승기를 수여하였다.
마땅한 볼거리가 없고, 전통적인 의식구조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시절, 지역 대항전 형식의 각종 운동경기는 주민들의 관심과 애향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특히 전주, 군산 스포츠를 대표하는 야구와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두 도시 시민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동경 유학생 야구단 모국 방문 경기
군산은 1932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옥구군 구암리, 신풍리, 둔율리, 경장리 일부가 부(府)로 편입되면서 도시가 대폭 확장된다. 부영(府營) 공설운동장도 그해 조성된다.
이듬해(1933년) 인구는 3만 5,999명(조선인 2만 6,508명, 일본인 9,106명, 외국인 385명)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1990년대까지 군산의 관문 역할을 했던 소화통(중앙로 2가) 역시 그즈음 개설된다. 3차 축항공사(1926~1933년) 완공으로 1934년에는 일본으로 반출된 쌀이 2백만 석을 넘어서게 된다.
재동경조선유학생(在東京朝鮮留學生)으로 조직된 야구팀이 1935년 여름 군산을 방문, 경기를 치렀다.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 군산 지국과 조선 매일신문 호남지사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야구대항전(동경유학생팀-군산팀)이 군산체육협회 후원으로 그해 7월 1일 오후 5시 일출정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것.
동경 유학생 야구팀 선공(先攻)으로 시작된 대항전은 박진감 넘치는 경기로 시종일관 화끈한 타격전이 펼쳐졌다. 1회 초 유학생팀이 선취점을 뽑자 군산팀이 1회말 두 점을 따라잡고 3회말 공격에서 한 점을 추가, 역전(3-1)에 성공한다.
이후 5회까지 팽팽한 접전이 펼쳐지다가 유학생팀이 6회에 3점, 7회에 2점을 빼내 재역전(6-3)된다. 멋진 더블플레이까지 보여주며 재역전에 성공한 유학생팀은 9회 초에도 2점을 추가,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어느 쪽에도 미소를 보내지 않았다. 8회말 군산팀이 1점을 추격하고, 9회말 대거 4점을 뽑아 동점을 만든 것. 두 팀은 경기 내내 불꽃 튀는 공방전을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무승부(8대8)로 게임이 종료된다.
이변과 파란이 거듭됐던 야구대항전은 일몰 시각(오후 7시 20분)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입장료 20전을 받았음에도 군산에서 처음 개최된 큰 경기여서 수천의 관객이 입장했으며, 동경 유학생 야구팀은 열정과 투혼으로 많은 격려를 받았다.
당시 군산야구팀 진용은 황 동(黃 童: 투수), 김수복(金壽福: 포수), 김동극(金東極: 중견수), 박상석(朴尙錫: 2루수), 김귀성(金貴成: 유격수), 김행규(金幸奎: 3루수), 김구영(金九榮: 1루수), 김수연(金洙連: 우익수), 양태근(梁泰根: 좌익수), 전의용(全義鎔: PH) 등으로 짜여있었다.
동경 유학생 팀은 이준용(李駿鎔: 감독, 중견수), 박경원(朴慶元: 매니저, 좌익수), 진성섭(陳性燮: 유격수/주장), 박만경(朴萬慶: 투수, 1루수), 김영규(金泳圭: 포수), 김태호(金泰浩: 3루수), 이기경(李起卿: 투수, 1루수), 손해룡(孫海龍: 2루수), 김영하(金永河: 우익수), 배기협(裵基協: 좌익수), 박경원(朴慶元: PH) 등이었다.
제1차 동경 유학생 모국 방문단 야구 경기는 1909년 7월 21일 한성훈련원(조선시대 무과 시험장)에서 개최됐다. 상대는 황성 YMCA야구팀(선교사들과 혼성팀)이었으며 유학생팀이 19-9로 승리하였다. 이후 유학생들은 10여 차례 모국을 방문, 지방을 순회하며 시범경기를 갖는 등 한국 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동경 유학생들은 1937년에도 하기휴가를 맞아 축구와 야구팀을 조직, 모국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군산을 비롯해 대구, 목포, 광주, 서울, 해주, 평양 등 일곱 도시에서 경기를 갖고자 하였다. 그중 야구단은 7월 10일 오후 4시 일출정 공설운동장에서 군산 야구구락부와 경기를 치르겠다고 선수 명단까지 언론을 통해 발표했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취소된다.
신문에 소개된 두 팀 선수단 중 군산팀 임원은 부장 여 홍(餘 鴻), 감독 손귀성(孫貴成), 주장 양태보(梁泰寶) 등이었고, 선수는 양태근(梁泰根), 김동극(金東極), 이완고(李完高), 손귀성(孫貴成), 현부남(玄富男), 김귀성(金貴成), 김수운(金洙運), 김구영(金九榮), 려근영(廬根榮), 노갑종(盧甲宗), 이옥동(李玉童) 등으로 이뤄져있었다. (계속)
덧붙임: 1935년 여름 군산에서 개최된 동경유학생-군산팀 야구대항전 결과는 신문마다 다르게(‘8대8 무승부’, ‘8대7 석패’) 보도하고 있다.
그해 7월 4일 치 <동아일보>는 ‘수천여군중리(數千餘群衆裡)에 개막되어 동(同) 7시까지 일대(一大) 백열전(白熱戰)을 연출한 결과 동경유학생이 8대7로 아깝게 패배했다’며 ‘유학생군(留學生軍)은 원로(遠路)에 하루도 휴양(休養)치 못하고 몹시 부닦인 관계(關係)로 워낙 피로(疲勞)하야 그와같이 참패(慘敗)한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조종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