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52냐 81,258이냐, 팔만대장경판 숫자에 대한 쓰디쓴 생각

이강록의 '만언각비'

2021-06-12     이강록 기자

인간의 번뇌는 8만 4천 가지라고 했든가. 그래서 그 번뇌 각각을 처방하는 법문을 담아 모은다. 그 대장경을 팔만대장경이라 했다든가. 어쨌거나 대장경은 불교 경전 전체를 가리킨다. 대장경은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으로 이뤄진다.

곧 삼장(三藏)이다. 삼장이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트리피타카 tripitaka’를 한문으로 옮긴 말. 그리하여 유네스코에 등재된 팔만대장경의 학명은 ‘트리피타카 코리아나’이다.

‘팔만대장경’(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32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인류사적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얘기다. 세계에서 최고로 큰 목판 인쇄 문화재다. 그보다 먼저 몽고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한 고려 백성들의 염원을 한데 모아놓은 땀과 눈물의 결정체다.

그러나 아무리 국가적 염원에 따라 종교적 신심을 밑거름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불가사의하고 어머어마한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추사 김정희는 팔만대장경을 보고 “사람이 쓴게 아니라 신선이 쓴 글”이라고 했다. 그저 필체를 보고 그랬을까. 아마도 거기 들인 정성과 노력이 그렇다는 뜻이었을 게다.

팔만대장경 하면 대개는 경판(經板)이 팔만 장인 것으로 여긴다. 누가 그걸 꼬치꼬치 81,352 장이라고 셈하려 들겠는가. 통상 어림수로 말하기 때문이다.

팔만 장이 넘는 경판 양쪽에 6백40자가 넘는 글씨를 깔끔하고 예쁜 글씨로 새겼으니 숫자도 놀랄만한 숫자지만 얼마나 대단한 예술품인가. 종교적 기념물이기 전에 우리 민족의 저력을 가늠할 보물중의 보물이다.

그럼 한번 살펴보자.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몇 개나 될까?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사 이후 8만1258판으로 알려져 왔었다. 이 때 숫자는 총독부 관리 ‘오다 간지로(小田幹治郞)’가 정한 것이다. 줄곧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숫자를 일본인의 셈에 따라 ‘그러겠거니’ 하고 무신경하게 따랐거나 아니면 ‘그 숫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하면서 무책임의 극단을 달린 결과였다. 그러니 정부가 1962년 국보로 지정할 때에 이 수치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별도의 확인작업조차 없었다.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대접이 이랬다. 아니 우리의 문화재 정신이 이 정도다.

하지만 뒤늦게서야 확인작업을 한다. 2015년 문화재청이 재조사한 결과 경판 수는 8만1352판으로 확인됐다. 고려말~조선말기 글자가 닳아 없어진 옛 원판 대신 새로 깎아 넣은 보각판 82판과 1915년 오다가 만든 보각판 18판, 오다가 만든 보각판을 1937년 다시 복제한 18판 등 118판이 원래 경판에 추가로 보태진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된 것이다.

논란중인 경판을 포함한 대장경 총수도 오다의 애초 조사치보다 94판이 많은데 이 중 36판은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이다. 오다 간지로가 만든 보각판 18판, 그가 만든 보각판을 다시 복제한 18판 등 진품이 아닌 것도 섞여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때 제작된 경판을 제외할 경우 팔만대장경 경판은 8만1316판이다.

팔만대장경에 일제강점기 경판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려 문화재청은 그 숫자를 매듭짓지 못했었다. 이 때문에 문화재청은 2000년부터 실시한 ‘해인사 고려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사업’, 2014년에 수립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관리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8만1352판으로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8만1352판이라는 숫자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1937년에 제작·추가된 36개 경판이 포함된 수치다. 이런 경판들의 문화재적 가치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엇갈리는 실정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 경판들을 국보에 포함시킬 지 여부를 놓고 의견이 나뉘어져 있었다.

“일본인들의 사상이나 정신이나 어떠한 것도 들어있지 않은, 고려인이 만든 대장경을 복원하고자 했을 뿐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오용섭 당시 문화재위원)

일제가 주관해 만든 것인 만큼 36판을 포함시켜선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신승운 문화재위원(동산문화재분과 위원장)은 “문화재에는 시기상 하한선 문제가 있다”며 “일제강점기 판을 별도로 근대문화재로 등록할 수는 있지만 국보에 포함시킨다면 가치의 문제가 생긴다”고 밝혔다. 그는 “1937년에 만든 한 질은 만주국 푸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인 사상·정신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아야 고려인이 만든 대장경”

팔만대장경은 경판 서체가 맵시 있고 예쁘지만 모두 일정하고, 오탈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체가 일정한 것은 글씨를 담당한 사람들의 글씨체를 모두 일정한 모양으로 일치시키기 위해 거의 1년에 가까운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판에 새겨진 글자 수는 5,272만9,000자이다.

이 많은 글자 가운데 발견된 오탈자는 단 158자. 그것도 현대에 와서 겨우 찾아냈다. 오탈자율이 0.0003%다. 이게 어느 정도의 비율이냐면, 200자 원고지 1645장 분량(A4용지 10포인트 글자로 빼곡하게 200쪽)을 썼는데 오탈자가 한 글자밖에 없다는 뜻이다. 얼마나 여러 번 교정하고 확인했으면 그럴 것인가. 아무리 신심으로 해냈다고 해도 엄두가 안나는 정성과 집중력이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팔만대장경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한다. 결국 이 작업을 하면서 절을 무려 1억5,800만 번이나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만큼 신심을 다 쏟아 만들었다는 증거다.

고려 선조들은 부처님 은덕으로 몽골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나무판 8만 장에 새긴 대장경을 16년 만에 완성했다. 경판 앞뒤로 644자를 새겨 넣었다. 모두 합치면 5272만여 자. 각 글자의 크기는 가로·세로 1.5㎝ 정도다. 이를 이용해 경전을 찍으면 약 6800권이 된다. 인쇄를 하기 위한 목판이다. 따라서 글자는 물론 뒤집어 새겨야 했다. 심지어 어떤 한자는 62획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가령 앞면을 다 새기고 뒷면을 새긴다 하자. 그런데 어느 대목에서 한 글자 삐끗 잘못하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어느 경판에서도 오자(誤字)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정성과 노력은 가히 초인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술적으로 따져보자. 경판 한 개의 크기는 가로 2척 3촌(약 69.7cm), 세로 8촌(약 24.2cm), 두께 1촌 2분(약 3.6cm). 무게는 3∼4㎏이다. 총 무게는 285톤에 달한다. 2.5t 트럭에 실으면 112대 분량이다. 1명이 6∼7㎏을 머리에 이고 옮겼다면 4만여명의 운반 인력이 필요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경판을 가로로 죽 늘어놓으면 길이가 약 57km에 달한다. 이는 서울에서 경기도 오산까지 거리와 맞먹는다. 판판하게 눕혀서 쌓아 올리면 높이가 3천250m가량으로 2천744m인 백두산보다 높다.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으로 부르는 대장경판의 정식 명칭은 ‘해인사 대장경판’이다. 경판 전면을 한 번 보기 위한 간절함 때문에 대장경 공개 행사의 날까지 정해서 직접 보려 애쓰기도 한다. ‘지금 안 보면 죽기 전에 한번 못 볼 수도 있다’는 불자들의 애끓는 마음이 더욱 경판보기를 재촉하기도 한다.

‘해인사 대장경판’ 이제 제대로 대접해주자

너니 나니 할 것 없이 모든 국민들이 ‘해인사 대장경판’ 이제 제대로 대접해줘야 한다. 불교도냐 아니냐를 떠나서 국가적인 문화재이자 선조들이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함께 뭉쳐 만들어낸 국가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유산의 숫자를 잘못 셈하는 것은 곧 당신의 출생 연월일을 잘못 알고 당신 생일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아직도 문화재연구자, 동양학 연구자, 역사연구가라는 사람들조차도 기고문이나 칼럼에 경판수를 버젓이 81,258장이라고 사용하고 있다. 「문화재사랑」 6월호에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의 글 ‘민족의 의지, 목판에 새기다 ― 팔만대장경’이 대표적이다. 내용은 유익했지만 경판 숫자가 눈에 밟혔다. 그것도 글 첫머리에 나와 있어서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이런 지적은 ‘나무 박사’로 저명한 데다 문화재위원을 지낸 박 명예교수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의도가 결코 아님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대장경 경판이 나무여서 나무 전문가인 박 교수께서 관심을 두고 쓴 글이었으리라. 내용도 우리 문화재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는 중심 줄거리여서 충분히 공감이 됐다.

그런데 어찌 보면 매우 첨예한 핵심키워드인 경판 숫자에 너무 소홀했던 것 아닌지 의아스럽다. 필자 박교수의 무신경이라기엔 너무 세심하지 못한 숫자 사용이었다. 더욱이 소개된 매체가 하필이면 「문화재사랑」이다. 바로 문화재청의 기관지 아닌가 말이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문화재청의 「문화재사랑」 발간에 있어 문제점까지 지적할 수 있다. 문화재청의 활동이나 업무내용을 홍보하고 국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관지를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민감한 내용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흘려보낼 수 있을까. 내용이나 편집상의 허술함, 필터링 부재를 꼬집지 않을 수 없다.

그냥 가볍게 읽고 넘기라는 뉴스레터였다면 모를까. 대장경판 숫자, 문화재청이 바짝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토픽과 내용, 끊임없이 고민해야할 숙제 아니던가. 그 사이에도 무수한 논란이 있어 왔고 두고두고 궁리해봐야 할 그런 사안 아니었는가 말이다. 더구나 대장경판 말고도 조선왕조 의궤, 서원과 사찰 등의 목판 문화재 보수 및 유지와도 관련돼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써야했지 않는가 생각된다.

세칭 전문가라는 이들이 이처럼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수치를 사용하지 않고 무심코 과거 수치를 인용하니 정보이용자들은 혼란스럽다. 그저 혼란에 그치면 차라리 괜찮다. 아직도 일제강점기 문화적 식민근성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쓴소리까지 듣게 된다.

그러니 전문가들이여! 부디 자신의 표현이나 근거자료에 신경 써서 드러내주기 바란다. 또 정부의 공식발표 숫자는 따라주는 게 마땅하다. 그것이 전문가라는 지위에 걸맞은 책임이자 도리이다. 그래야 부질없는 논란과 사회적 에너지 낭비를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채근하는 걸 까탈스럽다고 섭섭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냥 따지지 말고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는 게 좋은가. 이처럼 야박스럽게 따지고자 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우리나라 기록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정확한 숫자를 이르집고자 한다.

그것이 해당 문건 필자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국가기관을 위해서 유익한 일이다. 나아가서 정보 이용자인 국민의 혼란을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앞으로 세칭 전문가들의 ‘부주의 맹시’ 또는 ‘통계숫자 무감각’을 바로잡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해인사의 한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꼼꼼하게 다 읽으려면 전문가라도 하루 8시간씩 투자해 30년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8시간씩 30년을 읽어야 모두 읽을 수 있다. 그냥 읽는데 그렇다는 얘기다. 그 뜻이나 가르침을 헤아리거나 새기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모름지기 경전이란 무엇이던가. 삶과 죽음, 현재와 미래, 선과 악을 깨우쳐주는 위대한 가르침 아니던가. 그러니 우리가 그 속에서 해답을 얻고자 애를 쓰지 않든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세 구절 속에 『팔만대장경』의 깊은 뜻이 다 들어 있다.”

법정 스님의 말이다. 온갖 법문이 다 들어있는 팔만 대장경. 그런데 법정스님의 가르침대로 세 구절 속에서 『팔만대장경』의 깊은 뜻을 알아챌 수 있을까. 마음 밝은 이는 문득 깨우쳤을 터.

하기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경전을 “입으로 읽지 말고 뜻으로 읽으며 뜻으로 읽지 말고 몸으로 읽자”고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