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 면장을 하련만
이강록의 '만언각비'
‘알아야 면장을 하지.’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일을 전혀 엉뚱하게 처리하는 사람을 두고 답답할 때 쓰는 표현이다. 물론 자기 스스로 역부족일 때 자조적으로 쓰기도 한다.
여기서 면장이란 어떤 뜻인가. 면(面) 행정의 책임자 면장을 말하는가. 흔히 그렇게들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딴에는 면장이 세상사를 두루 알고 있어야 지역 주민의 이해와 요구를 적극 수용할 수 있다고 여겼을 법하다.
아마 면장은 누구보다 면내 사정에 훤할뿐더러 면 단위에서는 거의 전지전능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게다. 허나 ‘면장을 한다’는 건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답은 공자(孔子)가 가지고 있다.
면장은 본디 ‘면면장’을 가리킨다. 공자가 아들 리(鯉)에게 수신제가(修身齊家)에 힘쓰길 강조하는 대목의 면면장(免面牆)에서 유래했다. 담장(牆)에 얼굴(面)을 대고 있는 상황을 벗어난다(免)는 뜻의 면면장을 줄여 쓴 말이 면장이다. ‘면(面’이 탈락되고 ‘면장(免牆)’만 남아 지금에 이르렀다.
얼굴이 담장을 마주 보고 서면 무엇이 보이겠으며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이런 상태가 바로 면장(面牆)이다. 그렇다면 이런 면장 상황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 답답함을 면하는 방법이 바로 책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여 세상살이에 눈을 뜨는 것이다. 물론 공자 선생님의 해법이다. 요즘에야 인터넷에 밝으면 면장이 될 터. 또는 실무와 세상 만사에 달통해야 하겠지.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알지 못하니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내딛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공포스러운 거다.
결국 아는 것이 부족해서 답답하고 거북한 마음이 면장(面牆)이고, 이 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면장(免牆)이다. 공부에 힘써야 이처럼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 상황을 벗어나 사람다운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무엇인가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야 답답함을 면할 수 있다는 공자의 말씀에서 유래한 속담이 바로 ‘알아야 면장을 하지’이다. 그런 뜻을 정확히 모른 채 면(免)자를 떼어버리고 쓰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면장(面長)으로 잘못 받아들인 거다.
공자는 어느 날 공부에 게으르고 촐싹거리는 아들 리에게 일침을 놓았다. "너는 시경(詩經)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배웠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마치 담장(牆) 앞에서 얼굴(面)을 바로 대고 서있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느니라" 논어 양화(陽貨)편에 나온다.
공자의 말씀을 쉽게 풀어보면 이런 뜻이다. 시경은 모두 300편으로 돼 있다. 이 가운데 최소한 주남과 소남의 편수인 25편은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지방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오자 너도나도 주민대표가 되겠다고 나서고 있다.입지자들이여! 여기서 우선 한가지 당부하자. 부디 눈앞에 가려진 높은 담장(경제는 불황의 극이요, 코로나 역병은 온통 사회를 꽉 막히게 했지, 이곳저곳 숨통이 막혀 답답하다 못해 암울한 현재상황)을 벗어나 눈앞에 탁 트인 광경을 볼 수 있게 해줄 확신과 역량을 가졌는지 돌아보기 바란다.
도지사, 시장‧군수 지망생들이여! 그대들이 어느 자리를 꿈꾸고 있는지 돌아보시라. 그 자리는 제대로 알아야 하고 앞날에 대한 비전까지 갖춰야 하는 막중한 책임자의 위치가 아닌가. 하지만 그간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는 것에 소홀했고 무신경했고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제 한몸 으스대며 제 잇속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던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내 고장 내 주민들은 낙후되고 쪼그라들며 천덕꾸러기가 돼가도 나몰라라 했지 않았던가.
지역이야 쇠퇴하다 못해 소멸 위기에까지 내몰려도 ‘설마 그럴 리가’하면서 자기 셈속에 여념이 없었다. 아뿔싸! 우리가 지역 대표들을 잘못 선택한 대가를 고스란히 우리 스스로가 받는가 자책도 해봤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지역 독재, 이른바 지역내 일당 독재의 폐단이기도 했다.
이제 새로 지역대표에 도전하는 이들은 이런 무책임과 폐단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커다란 자각과 성성찰이 있어야 함은 필연이다. 적어도 부작위의 죄를 짓지 않으려면 말이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되묻지는 말 일이다. 적극적인 범죄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무죄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적어도 지역대표라면 최소한 기본 책무는 물론이고 나아가 쇠잔해가는 지역의 소생과 경쟁력, 더 크게는 미래의 생존방안까지 아우르는 비전을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러나 그간 자기현시에만 몰두했던 지역 대표들은 처신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아마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듯 싶다. 자신의 과오와 부작위의 죄를 도덕적 죄라고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인지부조화라고 말하는 그 결과다. 그래서 향응이나 접대도 지역민을 위한 것이고 부정청탁이나 직권 남용도 지역발전을 위한 것이 돼버린다. 바로 자신의 모든 행위가 지역 지역민을 위하는 행위라고 믿어버리는 그 착란과 손쉬운 자기과신이 빚어낸 난센스다. 그래서인가. 자기 잘못에 대해 뉘우칠 줄 모른다. 한번도 지역민들께 진심어린 사죄를 하지 않는다. 아니면 뻔뻔함이 체질화돼서 인가. 형사처벌 받아야 그때가서 마지 못해 얼굴을 조아린다.
생각해보면 지역민을 대리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민을 위한 봉사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당연하고도 원론적인 성찰이 들어 있다. 선량(지망생)들이여! 늘 그대들이 입에 올리지 않는가. “도민(시민‧군민)을 위해서라면…”하고. 때문에 선량이 되고자 하는 의욕은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자기표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면장(免牆)을 위한 선량일 때만 그렇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적어도 부작위(지역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고민과 비전 만들기에 관한)도 죄가 될 수 있다는 책임있는 선량이 되려면. 누구를 위해서인가. 당연히 지역민들을 위해서다.
/이강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