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이락(烏飛梨落)
만언각비(漫言覺非)-④
요즘 농가는 물론 도회지에까지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니 사살하게 되고 결국은 사냥을 허용하는 쪽으로 논의가 되는 모양이다.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고사가 ‘오비이락(烏飛梨落)’이다. 웬 뜬금없는 얘기인가 하지만 한번쯤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오비이락’은 흔히 좋지 않은 일이 공교롭게도 잇따라 일어 날 때 별로 달갑지 않게 쓰이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이 불교설화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본딧말은 '오비이락 파사두야(烏飛梨落 破巳頭也)'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는 말 뒤에 '그 배가 떨어지면서 마침 뱀을 맞춰 뱀의 머리가 깨졌다'는 뜻이 이어진다.
이 얘기의 전말을 살펴보면 엄청난 교훈이 숨겨져 있다. 그 사연은 좀 길지만 이랬다고 한다.
까마귀가 배나무에 앉았다가 날아가면서 어쩌다 배를 건드리는 바람에 배가 떨어졌다. 배가 마침 땅에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의 머리를 맞춰 뱀이 그만 머리가 깨져 죽고 말았다. 까마귀의 잘못도 아니지만 뱀은 죽는 순간 알게 모르게 까마귀에게 원한을 품었음직하다.
윤회의 업보런가? 까마귀는 죽어서 꿩으로 환생하고 뱀은 죽어서 두더지로 다시 태어났다.
아마 뱀은 땅 속에서 살면 변을 당하지 않겠거니 해서 두더지로 태어난 것 같다. 노상 땅속을 헤집고 다니던 그 두더지가 어느 날 바위를 건드려 그만 바위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바위는 공교롭게 둥지에 낳아놓은 꿩 알 위로 떨어져 알이 모두 깨지고 말았다.
두더지는 다시 죽어서 멧돼지로 태어났고 꿩은 죽어서 사냥꾼이 됐다. 그리고 이 사냥꾼은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다른 짐승은 잡지 않고 오로지 멧돼지만을 잡으려 들었다. 어느 날 사냥꾼이 멧돼지를 발견해 잡으려고 쫓았는데 멧돼지가 도망가다 한 암자에 숨어들게 됐다. 마침 그 암자에는 전생을 훤히 내다보는 고승이 살고 있었다. 이 선승이 가만히 내다보니 원한관계에 얽힌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살생이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멧돼지를 보지 못했느냐'는 사냥꾼의 말에 고승은 사냥꾼에게 숙명통으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서로의 원한 관계를 설명해준 뒤 여기서 업을 끊으라고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사냥꾼은 더 이상 멧돼지를 죽이지 않고 출가해 불제자가 됐다고 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전생설화가 또 있다. 거슬러 올라가 곰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곰이 어린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개울에서 가재를 잡아 어린 곰에게 먹이려고 했다. 어미 곰이 물 속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들고 있으면 그 속에 숨어 있던 가재들을 새끼 곰들이 잡아먹는 식이다. 그날도 어미 곰은 낭떠러지 밑에 있는 개울에서 바위를 들고 새끼 곰들에게 먹이를 먹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낭떠러지 위를 지나던 나그네가 무심코 '에취' 하고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어미 곰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바위를 놓쳐버렸다. 때문에 그 밑에 있던 새끼 곰 네 마리가 모두 죽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나그네는 자기 재채기로 인해 새끼 곰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세월이 흘러 지상에 있는 것이 두려웠던지 곰은 죽어서 하늘을 나는 까마귀로 환생했고, 나그네는 죽어서 뱀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다시금 '오비이락'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아마도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악순환(Vicious Circle)인 셈이다. 허나 까닭 없는 행동 없고 원인 없는 결과 없다. 콩 심은데 콩 나는 격이다.
요즘 사람과의 관계 또는 세상일 사이의 관련성을 놓고 많은 생각을 한다. 신변잡사까지도 그 원인과 결과를 놓고,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조용히 돌아보면 결국 '오늘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만 같다. 그러다가는 세상사가 내 자신이 뿌린 씨앗이 아닌 듯해도 사실 모두 나와 연결돼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럴수록 오묘한 인과(因果)의 이치에 대해 깊은 울림을 얻는다. 살아가면서 ‘오비이락’ 그 다음을 잊거나 놓치면 안 된다.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