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절명과 절체절명, 무엇이 옳은가?

만언각비(漫言覺非)-③

2020-05-11     이강록 기자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

결론부터 말하건대 ‘절대절명’은 잘못 쓰는 말이다. ‘절대절명’이란 낱말은 없다. ‘절체절명(絶體絶命)’으로 적어야 맞다.

절대란 낱말과 절명이란 낱말이 있으니 이를 조합해 사용하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는 국어사용에는 분명히 규칙이 있고 문법이 있음을 무시하는 경우다.

절체절명은 국어사전 뜻풀이를 살피면, “목숨을 끊어야 할 정도로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런 예문이 나온다. “병들고 고단한 몸이 한 가닥 소망조차 끊어져 이제는 ‘절체절명으로’ 머리를 돌에다 부딪쳐 죽어도 시원치 않고, 누구를 깨물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다.” 여기서는 절체절명이 ‘어쩔 수 없어’의 뜻이 강하다. 이 예문도 썩 적절하지는 못하다.

그런데 많은 글쟁이들이나 언론인들이 그 말 본래의 뜻과 달리 제멋대로 쓰는 모양은 우습기 그지없다. 얼마나 꼴불견인지 다음 글들을 보자.

“지금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진정한 잠재력을 재확인해 볼 수 있는 절체절명의 기회다.” (ㅈ일보) 이 예문도 지나치게 호들갑스럽게 쓰인 경우다. 이 경우엔 ‘절호의’ 또는 ‘다시 없을’ 등으로 바꿔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 전통에 아들이 태어나면 그놈 몫으로 선산에 소나무를 심고, 딸이 태어나면, 밭두덩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그 집안의 절체절명의 소원을 위탁한 나무다.” (ㅈ일보) 이런 때에도 ‘간절한’으로 썼으면 더 어울린다. 공연히 절체절명이란 말을 써서 소원의 어감을 해치고 있다.

이런 표현은 얼마나 더 가관인가. “ 양파니 호박이니 깻잎이니를 듬뿍 넣고 호방하게 버무린 매운 낙지볶음을 절체절명의 타이밍을 맞춰 삶아낸 소면과 함께 먹는 것이다 ”. (M라디오)

낙지소면에 대한 맛 자랑을 하는 데에 굳이 절체절명이라는 거창한 낱말을 동원해야 전달력이 커지고 표현이 사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타이밍’이란 외래어와 연결돼 생경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 되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타이밍을 맞춰’를 ‘기막히게 때를 맞춰’ 쯤으로 해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아퀴를 짓는다면 어휘란 뉘앙스가 있는 법이고 제 맛을 살려 쓰려면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법이다. 의미상으로 통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데나 불러다 쓰면 소머리에 돼지몸통과 개다리를 갖다 붙인 격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게 된다. 플로베르의 ‘일사일어주의(일물일어설)’에 대해 한번쯤 유념한 이들이라면 이런 식의 어휘 남발을 지극히 꺼리게 마련이다. 

/이강록 <사람과 언론>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