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로 흐르던 원평천 물길 바꾼 '조선총독부'

[기획 특집] 미완의 친일 청산(21)

2021-05-30     박주현 기자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 지역으로 유명하지만 일제 강점기 수탈의 중심 현장이기도 했던 김제의 '친일 잔재' 지역 두 번째 편을 소개한다. 

일본인 농장 주택으로 사용됐던 김제 종신리 이시카와 농장 가옥(김제 종신리 한·일 절충식 가옥)을 비롯해 일본인들의 경제 수탈 중심지였던 구 백구 금융조합(부용금융조합), 김제 죽산보 수문, 구마모토 공덕비-웅본리평공적선불망비(熊本利平公積善不忘碑)를 차례로 소개한다. 

김제 종신리 이시카와 농장 가옥(김제 종신리 한·일 절충식 가옥)

김제시 죽산면 종신리 72-1

김제시 죽산면에 지어진 이 건물은 1936년경 지어진 이시카와(石川)농장에 소속된 주택이다. 목조 2층 건물로 이 가옥은 농장과 떨어져 있는데, 이시카와 농장에서 일하던 관리인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시카와(石川) 농장은 1926년 기준으로 전라북도 내 1,0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농장 중 하나이다. 이시카와(石川) 농장주는 석천현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설립된 석천현농업주식회사(石川縣農業株式會社)이다.

조선 내 지주제 농장 경영 및 농업척식사업 등을 목적으로 세워진 이 회사는 운영 초기부터 전북 김제군 일대에 100정보가 넘는 경작지를 확보하였고 1920년대 말에는 170정보 대의 경작지를 운영하는 소작제 회사지주로 성장하였다.

김제지역의 토지를 소유한 이 회사의 본사는 현재 김제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김제 지역의 일본인 농장에서 지은 주택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김제 구 백구금융조합(부용금융조합)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624-2

일본인들의 경제 수탈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건립된 백구면에 소재한 소규모 금융조합 건물이다. 이 시설은 일제의 식민지 사업 추진에 따라 일반 농민을 조합원으로 가입시켜 농촌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 공급을 목적으로 한다는 미명하에 김제, 부안 등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예금과 대부업무를 취급하였는데 실상은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행한 자체적인 농촌수탈 기구였다.

김제에서 생산된 쌀을 반출하면서 농민 착취에 선봉적 역할을 했던 이곳은 해방 후 1956년 농업은행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백구 농업협동조합이 자리하기도 했으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건물은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김제 죽산보 수문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 646-1

일본인 지주들이 계를 조직해 세운 보이다. 1919년 하시모토 등 일본인 지주들은 죽산계를 조직하여 죽산지류 인근 지역의 관개에 사용하기 위해 1921년에 보를 완성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진강 죽산지류인 원평천에 축조된 죽산보의 일부로, 소류지에 설치된 죽산보의 취수문에 해당한다.

해당 흔적은 구 죽산교 부근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준공일과 공사관계자 이름이 새겨진 마모된 석판이 붙어 있다. 본래 서해로 흘러가는 원평천의 물길은 하원리 방향으로 흘렀었는데, 조선총독부가 동진강 개수공사의 일환으로 1937년 원평천의 물길을 바꾸었다.

하원리 부근에서 동진강과 합류하던 원평천은 해창을 거쳐 서해로 흘러가게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1940년 하구 인근에 해창방조수문(해창갑문)을 세웠다. 이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죽산보는 식민지 유제로 남게 되었다. 

구마모토 공덕비-웅본리평공적선불망비(熊本利平公積善不忘碑)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212 아리랑마을 주재소 앞

구마모토 공덕비에 새겨진 명칭은 '웅본리평공적선불망비(熊本利平公積善不忘碑)'이다. 구마모토 리헤이의 적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1924년 극심한 흉년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정읍 김제 등 120만평의 농장지주였던 그가 농사지을 종자를 주어 고맙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마모토공덕비는 ‘아리랑 문학마을’ 터에서 발견됐고 현재 아리랑마을 주재소 마당에 전시되어있다.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는 1880년 나가사키 현(長崎縣) 출신으로 1902년 친구였던 마스토미 야스자에몬의 농장 지배인으로 있다가 1903년에 독립해 옥구군(沃溝郡) 박면(朴面) 내사리 및 내인군 화호리(禾湖里) 두 지역에 농장을 개설했다.

이후 토지를 계속 매수해 1931년 말 350정보를 소유한 대지주가 되며 1937년에 ‘주식회사 구마모토 농장(株式會社熊本農場)’를 설립했다. 일제강점기 수탈을 상징하기에 선정했다. 

※참고 자료 : 전라북도 친일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 결과보고서 (2020.12)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