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각시붕어-날아간 어미 새(2)
이용이 소설 '각시붕어'
순천에 있는 호텔다방으로 나가 선을 볼 남자를 기다린 송화자
송화자는 대학에 가려고 싫다고 했으나 아저씨가 “아주 좋은 혼처이니, 일단 선이라도 한번보라.”고 권했다. “신랑이 마음에 들면 결혼을 먼저 하고, 대학에서 공부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당시는 학교의 체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아, 결혼을 한 후에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애가 몇 명이 딸린 후에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다. 나이나 개인사정은 관여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너무 간곡하게 부탁을 하므로 송화자는 마지못해 “날짜를 정해서 선만 한번 보겠다.”고 하며 순천에 있는 호텔다방으로 나가 선을 볼 남자를 기다렸다.
정한 시간이 되자 양복을 말숙하게 빼입은 남자가 찾아와서 “제가 벌교 산등부락에서 살고 있는 박중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하고 정중히 인사 했다. 박중양은 밀양박씨 자자일촌인 벌교읍 산등부락에서 태어났다. 조상대대로 많은 전답을 가지고 부유하게 살면서,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다.
또한 산등부락 앞에는 품질이 좋은 진흙갯벌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그 곳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맛이 좋다는 꼬막을 비롯한 어패류와 낙지, 쭈꾸미를 비롯한 해산물이 생산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며 인심 좋은 마을을 형성했다.
특히 꼬막은 맛이 좋고 각종 미네랄 등 영양가가 높다고, 전국에서 상인들이 찾아와 구입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벌교꼬막”으로 널리 알려져 인기가 높아져 갔다. 현재도 벌교역 앞에는 꼬막으로 꼬막전, 꼬막무침, 꼬막회. 꼬막조림, 꼬막비빔밥 등 꼬막을 재료로 십여 가지에 이르는 반찬을 만들어 내는 전문 꼬막집들이 늘어서있다. 꼬막을 전국에 판매하는 상가들이 많이 있어, 전국의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산등부락 부녀자들은 시간이 날 적마다 갯벌로 나갔다. 제주도 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사용하는 테왁처럼, 송판으로 폭 한자, 길이 열자 정도의 널 배를 만들어 사용했다. 널 배위에 꼬막을 채취할 수 있는 갈퀴처럼 생긴 “때”라고 부르는 도구 와 꼬막을 잡아넣을 수 있는 바구니, 널 배위의 다리를 받쳐 줄 “똬리” 등을 실었다.
산등부락 앞 진흙갯벌은 입자가 미세하고 무기질이 풍부하여 매우 부드러웠다. 그러므로 진흙갯벌로 10미터쯤 걸어 들어가, 발이 푹푹 빠지기 시작하는 곳에서 왼쪽 무릎을 널 배위에 마련한 똬리위에 올리고 오른발로 갯벌을 밀며 종횡무진으로 내달렸다. 때라는 도구로 진흙을 긁어서 진흙 속에든 꼬막을 족집게처럼 잡아 올렸다.
어찌 보면 산등마을은 옛날부터 꼬막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해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돼, 굶주림이 없는 전국에서 몇 개 안되는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먹거리가 풍부하고 자자일촌으로 내려오다 보니, 서로 돕고 양보하는 인심이 좋은 마을이 되었다.
한눈에 반해서 약간의 기간 동안 교제를 해보기로 마음...
박중양은 일본에 건너가 수산전문대학을 마치고, 산등부락의 발전을 위해 일하러 고향에 돌아왔다. 커다란 배 3척을 가지고 가끔 마을 사람들과 고기잡이를 나갔다. 이렇게 부러울 것이 없이 잘 살고 있었고 일본에 유학까지 다녀온 미남자 박중양을 보자, 송화자는 한눈에 반해서 약간의 기간 동안 교제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둘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 주 일요일에는 “본인이 살고 있는 산등부락에를 가보면 마을 끝자락과 바다와 이어진 로렐라이 언덕이라고 불리는 높다란 언덕이 있으니 가보자.”고 박중양이 제의했고, 송화자도 찬성했다.
일요일 아침이 되자 박중양은 얼마 전에 새로 구입해 두었던, 캐주얼한 야외 복 차림으로 벌교 역전에 있는 동백다방으로 나가 송화자를 기다렸다. 화사하게 꾸며 입은 송화자가 햇볕이 따갑게 내리 쬐일 때 쓰는, 꽃무늬 양산을 들고 나타났다.
둘이서 녹차 시켜먹으면서 가족들 이야기를 나누다, 산등부락 가는 배를 타러갔다. 산등부락에 가는 배는 벌교 역전을 지나 상가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기찻길로 연결된 철교 밑에 있는 포구에서 산등부락 쪽으로 가는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는 30명 정도 탈 수 있었고, 밀물과 썰물의 물때에 맞추어 오전, 오후에 한번 씩 다녔다. 꼬막, 쭈꾸미, 게 등 해산물을 팔러가는 사람들과 벌교역에 있는 시장에 옷, 채소 등 생활용품을 사러가는 사람들, 그리고 잡화상 장사꾼들이 타고 있었다.
물결치는 바다와 가까이 있는 배의 난간에 걸터앉아서 송화자는 갈대밭을 지나, 돛을 높이올린 배가 바닷물을 가르며 천천히 앞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갈매기들이 떼로 몰려와 먹을 것을 달라고 “끼 욱, 끼 욱” 울어대자, 들고 있던 옥수수 알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더니 서로먼저 먹으려 득달같이 달려왔다.
이렇게 둘이서 재미있는 광경을 쳐다보고 깔깔거리고 웃기도하고, 헤엄쳐 다니는 숭어 등 물고기를 보면서 무슨 물고기인지 서로 묻고 대답하며 한 동안을 보냈다.
배는 제일 가까운 포구에 가는 손님들부터 차례로 내려주고, 내리는 승객들은 노를 젓는 뱃사공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며 30여분이 지나 산등부락 웃나루 포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둘이 내려, 마을 앞을 지나서 하얀 등대 앞으로 갔다.
하얀 등대 앞으로 가는 좁다란 농로 길에는 수확을 앞둔 고구마줄기 들이 고개를 내밀고, 가을바람에 춤추며 멀리 찾아온 송화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는 어느 곳에도 볼 수 없을 것"
파란 하늘아래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모습이 빨간 고추를 그려 놓은 수채화같이 예쁘게 보였다. 송화자가 잡으려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박중양이 송화자가 넘어질까 봐 고추잠자리 몇 마리 잡아 주자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고추잠자리도 잡고, 메뚜기, 방아개비 등 여러 가지 곤충도 쳐다보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덧 로렐라이 언덕이라고 불리는 등대 앞에 도착했다.
언덕위에서 바라본 바다는 끝없이 넓으며 누군가 쪽빛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푸른 물들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다. 바다위에는 갈매기들 사이로 배들이 떠있었다. 송화자는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는 어느 곳에도 볼 수 없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박중양은 언덕위에 피어 있는 들국화, 코스모스, 백일홍, 안개꽃 등 여러 가지 야생화를 꺾어다, 아름다운 화관을 만들어 송화자에게 씌워주고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리고 사랑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토끼풀로 사랑의 반지를 만들어 끼워주었다. 등대가 있는 로렐라이 언덕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곳에서 결혼을 약속 하였다.
박중양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바다풍경을 구경하고 있는 송화자를 불러서 “나중에 시집을 오면 매일 둘이서 로렐라이 언덕에 나와, 빨간모자를 쓰고 먼 바다를 비추고 있는 하얀 등대에서 바다를 쳐다보며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굳게 약속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배가고픈 박중양이 송화자에게 “집에가서 점심을 먹고 오자”고 했으나, 송화자가 집에 인사가는 것은 나중에 본인 집부터 가자고 말렸다.
하는 수 없이 로렐라이 언덕에서 조금 더 있다가, 배가 떠날 물때가 되어 포구로 내려갔다. 같이 배를 타고 벌교역으로 가 유명한 꼬막 식당에 들려 각종 꼬막요리가 나오는 꼬막정식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기차를 타고 순천에 데려다 주었다.
순천에 있는 송화자 집 앞에서 헤어지면서 송화자가 “오늘 초대해준 보답으로 다음 일요일 날은 순천구경을 하며 데이트를 하자”고 제의해 박중양이 좋다고 했다.
송화자, "다음 주 일요일에 집에 가자" 제안
다음주 일요일 아침이 되자 박중양이 순천역전에 있는 역전다방에서 송화자를 기다렸다. 순천시가 벌교읍보다 훨씬 넓고 인구가 많아 그런지 손님들이 무척 많았다. 혼잡한 손님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송화자가 찾아왔다.
대추차를 한잔씩 마시며 일주일 동안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던 중, 송화자가 “둘이서 데이트를 했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집에 한번 데려오라 해 다음 주에 데려오겠다고 했다.”고 말하며 다음 주 일요일에 집에 가자고 제안하였다.
다방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을 구경 가기로 하고, 강골마을을 지나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주변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어서 읍성을 찾아갔다.
송화자의 설명에 의하면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와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 이었다. “청동기 시대부터 축조돼 우리나라에도 평안도와 황해도 의 낙랑 처소였던 곳과 대방군의 처소인 사리원 동쪽에 흔적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읍성은 부, 목, 군, 현 등 행정구역의 등급에 따라 크기에 차이가 있었고, 크기는 백성의 수와 관계가 있어 조선시대 내륙지방은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다.” 한다. “해안 근처에는 바다로부터 침입해 오는 적을 방비하기 위해, 거의 모든 고을에 읍성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가 기록돼 있을 정도로 전국에 설치되었다”고 설명했다.
낙안읍성이 현재와 같은 마을로 만들어진 계기는 인조 4년에 임경업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하면서 부터였다. “태조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김반길장군이 흙으로 축조한 것을 인조 때 현재처럼 돌로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다.
“낙안읍성 마을은 동북쪽으로 지리산, 서쪽으로 무등산과 이어져 있고, 남으로는 남해 여자만의 해풍을 받아 품질 좋은 곡식이 생산되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했다.
박중양과 송화자, 손을 잡고 걸으며 성곽을 따라 구경...
이곳에는 깊은 우물이 없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전통마을의 여러 곳이 풍수지리에서 행주 형이었다. 낙안읍성도 행주 형으로 생긴 곳이어서 배처럼 언제나 가라앉을 위험이 있어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지 못하게 나라에서 금해, 파지 못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얕은 천연우물은 배안에 고인 물로 인식해, 퍼내야 배가 안전하므로 천연 우물을 쓰도록 장려 했다. “깊은 우물이 없는 낙안읍성에는 다행히 마을 중앙에 1미터 정도의 낮은 천연 샘이 있어 식수 공급은 걱정 없었다.”하였다.
특히 낙안읍성 중앙의 남내리 골목 안에 있는 1미터 정도 깊이의 천연 우물, 큰 샘은 물이 깊지도 않으면서 가뭄 때 마르거나 우기 때 넘치지도 않고 본래의 수위를 유지했다. 양질의 물을 사시사철 공급해 주므로 마을 사람들은 식수로 썼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정월 초삼일이 되면 우물제를 올리고, 이 물을 마시면 얼굴이 예뻐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 관광객 등 많은 사람들이 떠간다.”고 했다.
낙안읍성 성곽을 둘러싸고 있는 총길이는 동. 서. 남. 북으로 약 1000여 미터에 이르고, 성벽의 높이는 곳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5미터 정도였다. “성벽의 두께는 아랫부분은 8미터, 위로 갈수록 좁아져 윗부분은 4미터 내외”라 한다. 성벽은 큰 돌을 양쪽 바깥으로 놓고, 안쪽에는 잔돌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쌓았다.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로 박았고,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돌을 쓰면서 만들었다.
박중양과 송화자는 손을 잡고 걸으며 성곽을 따라 낙풍루, 쌍청루 그리고 진남루, 낙민루를 돌아보았다. 활을 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총안을 구경한 후, 성곽 주변 땅을 파거나 자연적 지형물을 이용해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해자를 구경했다.
다음으로 옛 감옥이었던 자리와 이웃한 이방의 집이었던 '박의준의 가옥' 소박한 초가집인 '양규철 가옥' 남문을 통해 들어가 남대리 길가에 위치한 '이한호 가옥' 낙안읍성 동서를 잇는 큰 도로변에 위치한 '김대자 가옥' 등을 차례로 돌아보았다.(계속)
/이용이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