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지우고 기다려야 얻어지는 사랑과 인생 그리고 시

[시평] 양병호(시인·전북대 국문과 교수)

2021-05-15     양병호 객원기자

나는 별 재주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 것 하나에도 당당히 손대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 못 하는 것 하나 할 수 있습니다.

명함으로 나무젓가락 부러뜨리기.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게는 큰 기쁨입니다.

심호흡한 뒤 숨 멈추고 나를 한 곳에 머물게 하기.

욕심 버리고 그 생각 지우고 그 마음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기.

부러뜨리려 하고 있다는 생각 못 버리면 명함이 찢어지고 맙니다.

내게는 사랑도 그 모양입니다.

어쩌다 사랑 하나 그려가다가도 사랑이란 말 겨우 생각나

“사랑합니다.”라고 말해 버리면 껍질만 흐느적거리고 있습니다.

혼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시(詩)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를 연발합니다. 버리지 못해 얻지 못합니다.

나무젓가락에 의해 늘 명함이 찢어지고 있습니다.

비어 있음이 가득한 순간이 왔음을 알리는 향기로운

초인종 소리 그립고 그립습니다.

장원상, 「나무젓가락 부러뜨리기」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가벼운 일탈의 기쁨을 맛보게...”

세상에는 남과 다른 별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에서처럼 명함으로 나무젓가락 부러뜨리기를 비롯하여, 500원짜리 동전 콧속에 넣기, 귀 펄럭대기, 3L 우유 한 번에 마시기, 혀로 코 만지기, 손가락으로 장단 맞추기, 눈알 굴리기, 이마에 숟가락 붙이기, 콧바람으로 촛불 끄기, 나뭇잎으로 연주하기, 방귀 연달아 뀌기, 코로 피리 불기, 물구나무서서 달리기, 전화번호부 통째로 찢기, 라면 10개 끓여 한 번에 먹기, 발가락으로 글씨 쓰기 등 참으로 별난 재주들 많고도 많습니다.

이러한 재주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별난 체험을 하게 함으로써 한순간 웃음을 짓게 합니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가벼운 일탈의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모두들 아마추어 차력사 아니면 마술사들인 것이지요. 관객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전도사들이기도 하고요.

시인/화자는 평소 무덤덤하고 별로 재주도 없는 평범한 사람인가 봅니다. 그런데 굼벵이도 한 가지 궁구는 재주는 있다는 말처럼, 화자도 남과 다른 하나의 재주를 가지고 있군요. 예컨대 명함의 날을 사용하여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리는 재주 말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식당이나 야외에서 이런 공연을 하면 다들 흥미 있어 하지요. 물론 처음엔 속으로 흥, 하고 약간 시덥잖아 하며, “그래 어디 할 테면 한 번 해 봐. 내가 구경은 해주지”와 같은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지요.

그러다가 공연이 성공리에 끝나면 박수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어느새 동화 몰입되지요. 그리고서는 “어이 이리 한 번 줘봐 봐. 그거야 나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내가 더 멋지게 한 번 보여주지” 하고 어설픈 모방 공연을 하지요. 결과는 뭐 뻔한 것 아니겠어요. “어라, 이것 참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더니만, 해보니까 별거네.” 어쩌고 중얼거리며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거지요.

그이가 실패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화자가 시원하게 공개한 이 재주의 원리랄까 방식에 대한 비방을 모르고 덤벼들었기 때문이지요. 그 비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호흡한 뒤 숨 멈추고 나를 한 곳에 머물게 하기. 욕심 버리고 그 생각 지우고 그 마음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기. 부러뜨리려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버리기”이지요. 이와 같은 원리를 적용하지 않고서는 백 번 해봐야 백 번 실패로 끝나기 마련이지요. 필경 부러뜨리려는 도구인 명함이 찢어지고 마는 거랍니다.

“뻔히 알면서도 실수를 저지르며 사는 것이 인생인 것”

요점을 다시 정리해 볼까요. 우선 자신을 고요의 경지로 밀어 올릴 것. 마음을 비울 것. 욕망을 억제하고 무념무상의 자세를 유지할 것. 정중동의 자세를 견지할 것. 결국 젓가락 부러뜨리려는 행동을 위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이야기이네요.

그래요. 모든 문제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구실이나 핑계를 자기 자신의 마음이 아닌 외부 세계의 탓으로 돌리지요. 시인은 이런 사소한 ‘젓가락 부러뜨리기’에서도 도를 깨닫네요. 나아가 이처럼 세상살이의 도를 깨우쳤음에도 그 적용이랄까 실제에서는 항상 실수를 연발하는 자신의 체험을 고백합니다.

누구나 다 하는 아름답고 성스런 사랑에서도 이론은 훌륭하나 실제는 실수투성이임을 고백합니다. “내게는 사랑도 그 모양입니다. 어쩌다 사랑 하나 그려가다가도 사랑이란 말 겨우 생각나 ‘사랑합니다.’ 라고 말해 버리면 껍질만 흐느적거리고 있습니다. 혼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여. 어디 이런 사랑의 실패가 그대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던가요. 우리 모두 마찬가지 경우랍니다.

누구나 ‘사랑합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획득과 소유에 대한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영속을 위하여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을 비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누군들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알면서 동일한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러고 보면 뻔히 알면서도 실수를 저지르며 사는 것이 인생인 것 같아요.

시인은 사랑이나 삶뿐만이 아니라 시 쓰기에서도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을 자책합니다. 버리지 못해 얻지 못함을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시인이여. 얻지 못함을 괴로워하는 시인이여. 무엇보다 먼저 얻는다는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라니까요. 시 쓰기도 인생처럼 아니 사랑처럼 자꾸 비워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뭐 그런 것이 아닐런지 몰라요.

그래서 시인이여. 그대가 그리워하는 혹은 욕망하는 “비어 있음이 가득한 순간이 왔음을 알리는 향기로운 초인종 소리”는 언제까지고 듣지 못할 지도 몰라요. 비어있음 혹은 虛 혹은 無는 그 경계가 없을 것이므로. 

/양병호(전북대 국문과 교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