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할 수 없다고 악다구니 쓰는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강병철의 '의학 에세이'
책을 마감할 때는 자질구레한 일이 끝이 없다. 이번 달에 4권을 마감한 셈이다. 한 권은 그나마 편집장님이 거의 다 맡아서 해주셨으니 끝냈지, 정말 너무 바빠서 맘 편하게 글 몇 줄 쓸 시간이 없었다.
Inheritance(Dani Shapiro) - 서양에서는 DNA로 혈통을 알아보는 일이 거의 유행이다. 평생 아일랜드인으로 영국인을 원수처럼 생각하던 사람이 토박이 영국인 혈통임을 알고 몹시 당황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대니 샤피로는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작가인데, 50대 중반에 들어서 DNA 검사를 받았다가 사랑하는 선친이 친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부모가 불임으로 인공수정을 시도했는데, 의사가 아버지의 정자를 의대생이 기증한 정자와 섞었던 것. 게다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너무나 쉽게 친부를 찾고 나자 정통파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에 확고한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이루는 모든 사람, 사건, 장소를 새로운 맥락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며, 유전적 가족을 만나기로 결정하면서 그들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
흔치 않은, 그러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개인적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 놓으며, 종교과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깊이 파고 든다. 의학적인 이야기가 가미되어 더욱 흥미로웠다.
The Tiger Rising(Kate Dicamillo) - 케이트 디카밀로는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 주인공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함께 극도로 가난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소년이다.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는데, 새로 전학온 소녀 역시 당돌한 행동으로 왕따 대열에 합류한다. 주인공은 매우 소극적인데 반해, 소녀는 적극적인 행동파이지만 둘은 개인적인 아픔과 학교에서의 따돌림이라는 공통분모로 친구가 된다. 소년이 사는 곳 주변 숲에서 우리에 갇힌 호랑이를 발견한 뒤로 일련의 사건이 빠른 속도로 전개되면서 두 아이는 가족을 이해하게 되고, 세상과 맞설 힘을 얻는다. 아이들의 막막한 심정을 묘사한 대목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눈시울을 적셔 가며 읽었다.
파과(구병모) - 캬, 백발의 할머니 킬러라니! 게다가 이름이 조각(爪角), 발톱과 뿔이다. 소재가 독특한 데다 <워저드 베이커리>를 통해 잘 알려진 가공할 필력 덕분에 손에서 내려놓기가 힘든 소설이다.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와중에도 늙어가는 몸과 정신에 대한 통찰이 문득문득 눈길을 붙잡는다. 결말이 조금 싱겁지만, 무엇보다 소설은 재미있고 볼 일이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페친 한 분을 떠올렸다. 왠지 그분의 이미지가 주인공과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지는, 물론 비밀이다.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정이현) - 작품은 탁월하되, 그 작품이 똑바로 대면하기를 촉구하는 현실은 착잡하기만 하다. 누구나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얼마나 버겁고 넌더리나는 일인가. 그런 곳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기란 얼마나 쉬우며, 그렇다고 인간 아닌 것이 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작품 해설은 생뚱맞다. 소설은 눈부시게 꽃피는데, 평론은 퇴보하는 것인가?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마야 안젤루) -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는 감수성이 남다른 데다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듯하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젊은 성인기의 사건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되어 몰입과 공감을 이끌어 낸다.
이 작품을 인종차별이란 코드로 읽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김욱동 교수의 해설에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안젤루는 이 책 뒤로도 몇 권의 자서전적 수기를 썼다는데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두 권(?)인 것 같다. 물론 제작비도 못 건질 것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엘리 위젤의 3부작 중에도 현재 구할 수 있는 것은 <나이트>뿐이다. 얇은 독자층과 취약한 출판계의 비애다.
리부트(김미경) - 공짜책이라 펼쳤다가 다 못 읽고 덮었다. 끔찍하다.
아비투스(도리스 메르틴) - 더 끔찍하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 생각보다 상상력이 예뻐서 1장까지 읽었다. 더 읽고 싶지는 않다. 글쓰는 연습을 좀 하면 좋겠다.
/강병철(소아과 전문의·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