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맞는 5·18...광주·전남과 달리 전북 '냉랭', 왜?
[지역언론 톺아보기] 5월 18일, 광주·전남과 전북언론의 차이
5·18 민주화운동이 어언 41주년을 맞는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민주화의 획기적인 디딤돌이 된 5·18 민주화운동이 다행히도 이제야 역사의 제자리를 찾는 듯하지만 미완의 과제들이 여전히 산적하다.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민중항쟁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왜곡되고 그 가치가 축소됐다. 심지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엔 기념식에서 부르던 제창곡까지 권력이 개입해 통제하는 형태가 반복됐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민주화를 향한 긴 도정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41주년을 맞는 지금도 ‘살육’을 주도했던 진상 규명은 미완인 상태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광주와 전남지역 언론들이 해마다 5월이 되면 5·18 정신을 되살리며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각종 행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유도하며 많은 지면과 영상을 할애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전북대 최초 5·18 희생자 발생, 그러나...
그러나 인접한 전북지역 언론들은 매우 소극적이다. 또 다른 미완의 규명은 광주와 인접한 전북에 대한 당시 상황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늘 아쉬웠다.
이 때문에 전북은 5·18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한낱 변방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북은 5·18과 직접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항쟁의 발화지점이었음을 여러 자료와 기록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침 17일 전북대에서 이세종 열사 추모식이 열려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참석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 지사는 "국가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며 "나치 부역자에 대해 전 세계를 추적해 처벌하는 것처럼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100년이 지나도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지사 전북대 이세종 열사 추모식 참석, 전북 지자체장들 무관심 대조
이날 추모식에는 비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시민들과 학생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다시 살아서 하늘을 보고 싶다’는 열사의 추모비 문구가 유난히 굵게 보이는 이날 추모식에 그러나 전북도지사와 전주시장 등 지역의 자치단체장들은 보이지 않고 이재명 경기지사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세례를 받았다.
인근 광주에서 매년 열리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는 해당 지자체장들은 물론 전국의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모여 숭고한 뜻을 기리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는 것과 너무 대별된다.
올해 광주에서 열리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은 41주년을 맞아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많은 정치인들이 전날부터 광주지역에 몰려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17일 전북대에서 계엄군을 상대로 농성하다가 이튿날 새벽 1시께 학생회관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이세종 열사와 관련된 행사는 고작 추모식에 불과하다. 그나마 시민과 학생들이 주도하는 행사라는 점에서 행정과 정치권의 관심·참여가 아쉽다.
5·18 첫 희생자 이세종 열사 죽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혹들
이 열사는 민주화 항쟁 첫 희생자로 인정받아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지만 당시 경찰은 사인을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시신 여러 군데서 피멍이 발견돼 계엄군에 의한 집단 폭행 의혹이 제기됐었다.
1980년 5월 17일 밤 10시 이후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는 학생들 약 40여명의 모여 있었다. 당시 철야농성을 계속해오던 학생들은 불안한 정국 속에서도 투쟁방향 등을 논의하고 있었다.
계엄군의 진입소식을 듣고 김남규 학원자율화 추진위원장, 이광철 민주화투쟁위원장, 이송재ㆍ최인규(복적생) 등 학생지도부는 피신했으나 나머지는 체포됐다.
당시 제주도를 포함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계엄확대조치에 따라 진행된 해산조치는 불과 30~40여 분 만에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북대 학생 한 명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바로 5·18 첫 희생자가 전북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세종 열사(당시 21세. 전북대 농과대)가 학생회관 아래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이 열사는 당시 호남대학총연합회 소속 연락책임자를 자임하며 전북대 제1학생회관에서 농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집회에서 나눠줄 유인물 등사(복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자정께, 검은 베레모를 쓴 공수부대원들이 착검한 M16 소총과 긴 곤봉을 들고 학생회관에 들이 닥쳤다. 그 직후 18일 오전 1시께 학생회관 옆 바닥에서 온 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이 열사가 발견됐다. 경찰과 정부는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부검의였던 이동근 박사(전북대의대 병리학과 교수)는 유족들이 요청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용 의견서’에서 “이세종 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손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고 기록했다.
이 같은 내용은 비단 이 열사의 사인이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며 옥상에서 떨어지기 전 이미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 폭행당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 열사의 의로운 죽음이 세간에 알려지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열사는 이후 적어도 전북대에서는 민주화의 화신이자 시대의 양심으로 여겨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무려 20여 년 만에 광주 망월동에 안장됐다.
김제 월촌 연정리에 누워있던 열사는 1999년 4월에야 광주 망월동으로 옮겨졌다. 전북대 학생회관 옆에 그의 비가 세워지는데 5년이 걸렸고, 명예졸업장을 받는데 15년이 필요했다.
뒤늦은 ‘전북의 5·18’ 조명...지역언론 책임 커
계엄확대 조치와 그 일환으로 진행된 각종 체포와 구금이 바로 5·18의 서막이라고 볼 때, 이세종 열사의 죽음은 5·18과 관련한 첫 희생자이다.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가 2000년에서야 한 학술 세미나에서 “5·18 최초의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5·18 최초의 희생자는 바로 이세종 열사”라고 밝히면서 학계에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전북대와 5·18 구속부상자회 등은 학생회관 인근에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5월 17일에 추모행사를 열고 있지만 자세한 내막과 억울한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 지역 언론들의 책임이 크다.
그동안 오랫동안 외면하거나 소극적으로 보도해 온 지역 언론들이 최근에서야 이 문제를 조명하면서 그나마 이 열사의 추모행사가 빛을 보게 됐다.
전북지역에서 5·18과 관련된 민중항쟁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됐다. 우선 전북대 시위현장에서 체포 또는 구금된 사람이 35명에 달했다. 또한 5월 18일 직후 전주시내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광주살육작전' 유인물을 배포하고 민주화를 외친 시민들과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전주신흥고, 5·18 이후 이뤄진 전국 최초의 고교생 시위
대표적으로 전주신흥고 학생들의 시위가 5월 27일 발생했다. 5·18 이후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인물과 시위가 번지자, 신군부는 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냈다. 80년 8월 31일 전북대 20여 명, 원광대 2명, 군산대 1명이 제적을 당했다.
올해는 다행히 5·18민중항쟁기념 전북행사위원회가 전북대에서 이세종 열사 추모식을 시작으로 기념일 당일인 18일 이 열사의 모교인 전라고등학교에서 ‘이세종열사 장학금’을 전달할 계획이다. 또 18일 신흥고등학교에서는 5·27 의거 41주년 자체 기념식을 열며, 원광대 민주동문회에서도 임균수 열사 41주기 추모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특히 올해는 미얀마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기 위한 사진전이 전주풍남문 광장과 부안 홈마트 사거리에서 각각 5일 간 진행될 예정이다. 그나마 예년과는 다른 이색 행사들이 주목을 끌고 있지만 광주·전남지역과는 달리 전북지역 언론들은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박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