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쿠데타를 비판한다

백승종의 '역사칼럼'

2021-05-16     백승종 객원기자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제적 무능 때문이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4·19 혁명의 근본 동기도 빈곤에서 찾는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외침도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는 국민적 요구였단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가 무능해 시대의 요구를 배신했다는 것. 정의로운 군인들이 ‘5·16 군사혁명’을 일으킨 이유가 거기 있다니 점입가경이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함석헌) 이런 말도 있듯 학생이 시작한 혁명을 박정희를 비롯한 청년장교들이 완성했다니 아전인수도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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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5·16은 혁명이 아니라 군인들의 폭거였을 뿐이다. 서슬 퍼런 군인들 앞에 대놓고 호통을 친 함석헌이란 용자(勇者)를 아는가. 그는 따져 물었다.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고함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한국 민중이 4·19 혁명 덕분에 처음으로 말할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입을 틀어막은 것이 5·16이었다. 그것이 만약 혁명이라면 민중의 지지와 찬성이 있어야 했다. 민중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 것이 무슨 혁명이냔 것이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달 아닌가? 5·16은 꽃이 한번 핀 것이다. 잎은 영원히 남아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장군들에게 함석헌은 군정의 즉각적 종식을 요구했다. 그러고는 문제의 장본인 박정희 장군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

과연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는 법이다. 그래도 아직 여맥이 남았던가. 내일도 아첨의 꽃다발이 독재자의 무덤을 뒤덮을지 모르겠지만, 함석헌이 백번 옳았다.

섣부른 성장신화를 들먹이며 박정희의 공적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조심하자. 도둑에게는 결코 정의가 없다.

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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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에 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딱 60년 전의 일이지요. 이 사건을 신호탄으로 그야말로 많은 사건이 줄줄이 일어났습니다.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가 1979년 10월 26일에 사망한 뒤로도 여진은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박정희는 늘 말하기를, "후세의 역사가들은 ..." 이라고 톤을 높이면서 자신의 공적을 스스로 호평하곤 하였지요. 그 특유의 날카로운 음성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려 18년 동안이나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지요. "철권통치"라는 표현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어요. 권력남용과 월권, 부정부패와 인권유린이 날마다 태연히 그리고 공공연히 자행되었습니다.

"그래도 경제 하나는 건지지 않았느냐?" 이렇게 반문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굶어 죽을 민주주의보다는 보릿고개 없애고 고속도로 만든 공적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은 더욱 많지요. 후세의 역사가들도 아마 이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을 되풀이 할 것입니다. 박정희는 그 점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던 거고요.

"역사의 거울"은 평면이 아닙니다. 입체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거울 앞에서는 절대 악한도 없고, 지고지순한 성현도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제 평가가 궁금하시다구요? 정치적 민주화, 경제발전, 문화의 고양, 외교 군사적 성취 등. 이런 식으로 박정희의 시대를 각 항목마다 100점 만점으로 평가해서, 평균 점수를 준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요.

가중치를 부여하지 않고 평가한다면, 그가 제게서 받을 평점은 40점도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경제에 가중치를 높게 책정한다면 겨우 50점을 넘길 수 있을까요. 그가 군무를 이탈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우리 모두에게 실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